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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진 Jul 13. 2019

마흔, 나를 위해 펜을 들다

1. 왜, 나는 글을 써야만 했을까

                '글은 왜 써야 하는가?'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이 물음은 언제부터인가 숙제처럼 다가왔다. 글을 쓰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나는 이 물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나의 글쓰기는 '무작정'이나 다름이 없었고, 그저 글 쓰는 시간이 좋았던 것이라 별다른 이유를 찾기도 힘들었다. 보여 줄 사람도, 읽어 볼 사람도 없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는 뭔가가 계속해서 올라왔기에  나는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많은 시간 동안 글을 쓰다 보니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었지만 그것은 막연한 생각일 뿐이었다. '작가'라는 목표는 과정이 아닌 결과였기에 더더욱 나와는 거리가 있다고 느꼈다. 물론 결과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나는 무언가를 쓰고 싶어 하는 내 마음과 글을 쓰는 그 순간이 좋았기에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내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운명인지 몰라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나는 장편소설 한 편을 완성했다. 소설이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글이었지만 내 안의 소리를 적었기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어쩌면 내 20대의 방황과 유년시절을 그린 자전적인 스토리여서 더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는 애정을 갖고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틈틈이 부족한 글을 고쳤다. 다듬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소설은 깨끗함을 찾아갔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또 다른 불편함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점차 소설이 글다워지면서 누군가에게 확인받고 싶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느 날 밤, 나는 인터넷을 뒤적거려 한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3개월짜리 '소설 창작 수업'이라는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봄의 기운이 완연한 4월의 어느 날 저녁, 젊은 여류 작가가 진행하는 첫 수업에서 일면식 하나 없는 10명 안팎의 수강생은 어색한 공기가 가득한 공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약속이나 한 듯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말이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강의실 안의 묵직한 공기를 가르며 강사가 들어왔다. 간단한 인사가 오고 간 뒤, 강사는 수강생들에게 "소설은 왜 써야만 할까요?"라는 짧은 질문을 던지고는 잠시 물러났다. 무거운 정적이 다시금 나를 엄습해 왔지만 조금 전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수강생 모두 자신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했지만 쉽게 답을 내놓는 사람은 없었다. 나 역시 그럴듯한 답을 찾아보려 노력했으나 머릿속에서는 질문만 맴돌 뿐 그 어떤 답도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한 수강생의 목소리에 정적이 깨지며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대답이 쏟아졌다. 마지막으로 여자 수강생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옅은 미소를 머금은 강사의 입술이 나직이 움직였다.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존재에 대한 배고픔 때문일지도 몰라요."


 또다시 찾아온 정적, 나는 양 어깨를 타고 올라오는 전율에 말문이 막혀 강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언제부턴가 나에게 불편함을 줬던 물음, 그 알 수 없었던 답이 구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낡은 수첩 위로 펜을 움직였다.

 '존재의 배고픔 때문에 쓴다....'

 아직까지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도 가끔 글쓰기에 대해서 '이보다 더한 표현이 있을까?' 생각하곤 한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배고픔'이라는, 이것보다 명료한 답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까? 나는 솔직히 모르겠다. 답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기에 더 나은 답이 있다 한들 수고하고픈 마음은 없다. 비록 형편없는 글이었지만 단 하루도 멈추지 않고, 소설을 써낼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나 자신에 대한 배고픔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유도 모른 채 무작정 글을 썼지만 그것은 내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이었다. 어쩌면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마음의 부름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시절 미친 사람처럼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첫 수업 후, 욕구에 대한 답을 구해 어느 정동 불편한 마음을 덜 수는 있었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똑같이 수업에 참여했던 수강생들 모두 내 마음 같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수업이 끝나갈 때까지 그 누구도 이것에 대한 언급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역시 같은 생각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성격이 모두 다르듯, 글을 쓰는 이유 또한 그만큼 다양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글이란 자기 자신을 쓰는 일이기에, 자기 존재에 대한 배고픔, 즉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물음이 어쩌면 글쓰기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존재의 배고픔'이라는 문구가 갖는 의미는 '영원히 안고 가야 할 삶에 대한 고민 같은 것'이라 말하고 싶다. 채위지기 힘든 것, 뭔가를 채우기 위해 고민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 말이다. '정신적으로 배고픔을 느끼는 상태, 공허한 어떤 마음 때문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 수밖에 없는 것,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영원한 물음, 눈 감는 날까지 지고 가야 할 채워지지 않을 무엇'이 아닐까 한다.

 나에게는 유년 시절부터 줄곧 따라다니는 정서가 있는데,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정서는 중심에서 나를 밖으로 밀어내는 듯했다. 그리고 유년에서 사춘기를 거치는 동안 그 정서를 막연히 외로움이라 여겼다. 그러나 외로움이라 단정하기엔 그보다 광범위했고, 그 허전함을 채우기란 역부족이었다. 남들보다 홀로 지냈던 시간이 많았지만, 그 감정을 외로움이라고만 설명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전혀 틀린 답은 아니었으나 그보다 더욱 깊어 보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그것이 외로움이 아니라 '소외'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배고픔은 내 마음에 단단히 뿌리내린 소외감이었다. 여기저기 주변을 서성거릴 뿐, 어딘가 속하고 싶어도 속할 수 없는 불편한 마음이었다. 유년 시절부터 지니고 온 마음은 청소년이 되어서도, 또 성인이 되어서도 나를 계속해서 밖으로 밀어내곤 했다. 공허함과 허전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습관처럼 내 마음 이곳저곳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렇게 모인 나약한 마음은 안 그래고 나약한 나를 더욱 구석으로 내몰았다. 그래서 나는 떠돌 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속에 뭔가를 채워야 했기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떠돈다 한들 그 이유조차 알 수 없어서 해결도 쉽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더디게 자란 뇌가 성장을 멈췄을 때 비로소 배고픔을 채울 수 있었다. 무심결에 다가온 글쓰기가 조금이나마 내 마음을 어루만져줬기 때문이다. 나는 갑자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누가 시킨 것도, 굳이 써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왜 나는 글을 써야만 했을까? 배고픔이 아니었다면 써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어느 날부터 내 안에 숨죽이고 있었던 욕구는 빠르고 왕성하게 글이 되었다. 나는 글을 쓸 때마다 나 자신과 하나가 됨을 느꼈고 내 존재는 오로지 글을 쓰는 순간 선명해졌다. 그때만은 온전히 내 자신이 나의 것이었다. 글을 쓴다고 해서 배고픔이 완벽히 채워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쓸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쓰든 내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글을 통하면 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고, 내 안에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생각도 마음도 모두 정신이니 그 이유를 보고 쓰는 것만으로도 나름대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내면을 마주 한들 쉽게 갈증이 채워지겠냐마는 그 이유라도 알게 돼서 적잖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만약 글쓰기를 몰랐다면, 나는 그저 그렇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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