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사랑했다고 외치지 않고, '잘 지냅니까?'라고 묻는 이유
러브레터는 본래 일본에서는 1995년에 개봉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1999년에 개봉되었는데요. 4년이나 늦게 개봉된 이유는 1998년부터 우리나라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1998년 이전까지 우리나라 대중들은 일본 영화를 극장에서 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입 시기에 들어오게 된 러브레터는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서 우리나라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하지만 단순히 한 번의 흥행을 넘어서서, 러브레터는 2023년 현재까지 8번의 재개봉을 거듭하며 한국에서 꾸준한 사랑을 받는 중입니다. 때문에 이 영화를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보게끔 만드는 여러 요인들을 살펴보는 것은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직 영화를 접해보지 않은 분들이 있으시다면 꼭 한 번 감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홋카이도 오타루 시의 후지이 이츠키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그것은 히로코가 죽은 남자친구의 옛 주소일 것이라고 보낸 편지였다.
하지만 실은 동명이인인 여자 이츠키의 주소였다. 우연히 전달된 편지에 이츠키는 답장을 쓰고 히로코는 혼란스러워한다. 히로코가 극복해내고 새 관계로 나아가기를 원하던 아키바는 이런 히로코에게 오타루 여행을 제안한다. 히로코는 직접 찾아가기까지 하지만 조금 떨어져서 잠시 스칠뿐 두 여자 주인공은 서로를 마주하지는 못 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히로코는 졸업앨범에서 동명이인과 관련된 사실과 더불어 본인과 매우 닮은 첫사랑 때문에 남자 이츠키가 내성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사귀자고 고백한 것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편지를 계속 주고 받고, 히로코는 여자 이츠키의 편지를 읽으면서 남자 이츠키가 여자 이츠키를 좋아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여자 이츠키는 히로코의 부탁 때문에 중학교 도서관에 갔다가 '이츠키 찾기 게임'에 대해 듣게 된다. 동시에 은사에게 남자 이츠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바로 이 날 감기를 오래 앓던 이츠키는 병세가 악화되어 심한 고열로 사경을 헤매게 된다.
히로코는 남자 이츠키가 세상을 떠난 곳으로 여행을 가자는 아키바의 제안을 따라 그곳으로 향한다. 여기서 히로코는 남자 이츠키에게 매여있는 본인의 마음을 정리하고자 한다. 그리고 산장 밖 설원에서 이츠키 남에게 잘 지내냐는 물음과, 나는 잘 지낸다는 인사를 크게 마친다. 히로코는 여자 이츠키에게 남자 이츠키가 당신을 좋아했을 것이라고 답장을 보내지만, 여자 이츠키는 본인에게 장난만 치며 이해할 수 없던 남자 이츠키가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치부한다.
어느 날, 여자 이츠키의 중학교 후배들이 도서 카드를 들고 그녀를 찾아온다. 여자 이츠키는 그 뒷면에 그려진 본인의 초상을 보며 새로운 감정을 느낀다. 남자 이츠키가 아무런 이유 없이 찾아와, 대신 반납해 달라고 부탁한 그 책에 오래 잠들어 있던 첫사랑의 감정이 10년을 넘겨 여자 이츠키에게 전달되며 영화는 끝난다.
줄거리에서도 알 수 있듯, 작품에서는 후지이 이츠키라는 같은 이름, 혹은 같은 배우를 기용한 도플갱어와 같은 중복 모티프를 차용합니다. 더해 히로코가 이츠키의 장례식장 근처 설산에 누워있는 도입부와 이츠키가 죽은 설산 위에 올라서서 오겡기데쓰까를 외치는 결말부 또한 대칭을 이루는 모티프 요소입니다.
도플갱어와 눈에 관련된 전경을 조금 더 분석해 보자면, 영화에 등장하는 히로코와 이츠키가 머무는 장소는 고베와 오타루인데요. 이 두 곳은 한반도의 북쪽 끝과 남쪽 끝을 대각선으로 이은 것 정도로 거리가 멉니다.
이러한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히로코가 사는 고베와 이츠키가 머무는 오타루의 전경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똑같이 눈이 내린 풍경에서 인상이 똑같은 두 여자 주인공들이 전환되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두 여자 주인공들은 작품 내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남자 이츠키라는 교집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둘은 유사한 풍경에서 편지를 서로 공유합니다. 남자 이츠키는 설산에서 죽었고, 여자 이츠키는 심한 감기 때문에 폭설을 뚫고 병원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히로코는 이츠키가 죽은 설산 위에 올라 그에게 안부를 묻습니다. 이러한 점은 결국 인물들의 사랑과 추억이 삶과 죽음으로 교차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름이 같은 지점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두 남녀의 이름은 뚜렷하게 명시됨과 동시에 이름을 공유하는 첫사랑은 남자 이츠키에게 여자 이츠키와 닮은 히로코를 사귀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무엇보다도 과거를 간직했지만 현재에는 죽은 남자 이츠키와, 과거를 잊었지만 죽음의 위기를 모면한 이츠키의 대비 구조 또한 교차로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장면인 죽은 이츠키를 향해 히로코가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는 장면 또한 여자 이츠키가 고열 때문에 병원에 실려가는 장면과 교차되어 있습니다. 눈이라는 교차 지점은 여기서 다른 의미로 구성이 되는데요. 한 사람은 죽은 이의 애도를 위해 설원으로 향하고, 한 사람은 설산에서 벗어나 죽음을 피하기 위한 위기 상황으로 이루어집니다. 겹치며 동시에 진행되는 이러한 장면은 히로코가 설원에서 유명한 대사를 외칠 때에도 일어납니다. 이츠키는 그 말을 반복하며 둘은 마치 서로 이어져 대화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장면이 꾸며집니다.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자면, 동명이인인 여자 이츠키가 남자 이츠키 대신에 그 외침에 답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중학교 시절의 첫사랑과 어른이 되고 나서의 사랑이 공유되며, 한 인물이 가진 시간의 양면은 교차하게 됩니다. 때문에 남자 이츠키, 동명이인에서 비롯된 과거 사랑을 지닌 여자 이츠키와, 비교적 현재의 사랑을 간직한 히로코 세 인물은 하나로 엮이며 일종의 동질성을 지니게 됩니다. 즉, 교차를 뛰어넘어 삶과 죽음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순환의 구도인 것입니다. 서로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삶과 죽음이라는 속성은 이 영화에서 하나의 속성으로 이루어집니다.
러브레터에서는 넓은 설원, 설산, 남자 이츠키가 떠난 텅 빈 도서실과 같은 여러 엠티 샷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연출은 영화가 가지는 고요한 분위기를 환기 해주고, 인물의 감정을 심화하기도 합니다. 작품이 가지는 여운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러한 장면 연출이 만들어지게 된 이유를 알아보려면 오즈 야스지로라는 감독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일본 영화 화면 구성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일본 영화의 태동기에 주로 활동한 이 감독의 대표작은 <만춘>인데, 가장 큰 특징은 러브레터에서도 채택된 엠티 샷입니다.
<만춘> 에서도 인물의 흐름과는 관계가 적은 바다나 텅 빈 집과 같은 풍경을 비추는 장면들은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암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연출 기법은 1990년대 중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을 비롯하여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까지도 공통적으로 가지는 기조입니다. 일본의 평단은 이를 ‘신서정주의’로 일컫기도 했습니다. 러브레터와 환상의 빛은 공통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에 괴로워하는 여주인공들이 얻게 된 내면의 공백과 상흔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자연물과 풍경에 의탁해서 보여줍니다. 거대한 바다 혹은 산을 여주인공들은 응시하며, 외면하던 심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단순한 물아일체가 아니라 마음이 발화되어 드러나는 내면을 발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첫 장의 제목은 ‘풍경의 발견’입니다. 여기서 고진은 “주위의 외적인 것에 무관심한 내적 인간에 의해 처음으로 풍경이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풍경은 오히려 바깥을 보지 않는 자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러브레터에서 등장하는 풍경들은 여기에 부합합니다. 히로코가 바라본 설원과 설산은 그 자체로의 객관적 의미보다 히로코의 속을 드러내는 거대한 이미지의 주관적 풍경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편지에만 숨죽여 적는 그리움이 내부와 동일시된 외부의 풍경으로 인해 나오게 되며, 히로코는 내면을 외면화하는 순간에 끝내 도외시했던 본인의 마음을 마주하며 늘 하고 싶었던 말을 외치게 됩니다. 그것은 남자 이츠키에게 향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 동시에 애써 누르고 있던 잠재적 마음을 드러내는, 또 발견하고 소리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영화가 말하는 궁극적인 주제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 부분은 영화에서 두 번 등장하는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7권 <되찾은 시간>은 첫 번째로 중학교 과거 회상 이야기 마지막에 등장하고 영화의 결말에도 한 번 더 등장하는 중요한 소재입니다. 등장하는 책이 다른 시리즈가 아닌 7권 <되찾은 시간>인 이유에 대해 고려해 보자면, 여자 이츠키가 되찾게 되는 시간은 본인이 잊고 살아왔던 중학생 시절의 과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 이츠키는 그때의 책을 다시 보게 되고, 도서카드 뒷장에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것을 발견합니다. 편지에 답장했지만 떠오르지 않던 추억과 마음이 다시 되돌아오는 순간이기 때문에 의미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프루스트 모티프는 러브레터에 담긴 하나의 주요한 축입니다. 프루스트는 책을 쓸 때 철학자 앙리 루이 베르그송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베르그송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연구한 철학가입니다.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권에서는 영화에서 여자 이츠키의 편지로의 회상과 비슷한 부분이 등장합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사랑과 관심이 부재했다고 생각하던 주인공은 어느 날 어머니가 준 마들렌 과자를 먹으며 어떤 기쁨이나 환상에 사로잡히며 여러 추억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또한 마치 여자 이츠키의 상황을 묘사한 것 같은 문장이 등장합니다.
“그러자, 추억이, 현재 내가 있는 곳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내가 살았던 곳, 혹은, 내가 살았을지도 모르는 곳에 대한 추억이 저 높은 곳에서부터 구원처럼 다가와 도저히 내가 혼자서는 바져나갈 수 없는 허무로부터 나를 구해주었다.”
민음사 김화영 역 19p
비단 여자 이츠키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인용된 부분은 히로코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히로코 또한 남자 이츠키의 부재와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에 대한 상실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간을 되찾기 때문입니다. 두 인물 모두 이츠키에 관련된 기억의 혼재와 방황에서 이끌어 나온 추억이 공허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양상을 보입니다.
너무 많이 기억해서 괴로워하던 한 인물과 어떤 것도 기억나지 않아 허전해하던 다른 인물의 공통적인 근본은 여기서 발생합니다. 죽은 연인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히로코는 그에 대한 마음을 조금씩 정리할 수 있었고, 반면 아버지의 죽음으로 중학교 시절에 트라우마가 있던 여자 이츠키는 남자 이츠키와의 즐거웠던 추억으로 과거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첫사랑과 사랑 그리고 추억 혹은 사람에 대한 애도에서 결국 이들은 이츠키를 둘러싼 것 외에 본인에게 주어진 현재를 새로운 의미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긍정성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영화 러브레터의 주제는 굉장히 프루스트적입니다. 무의식적으로 침범 당하듯 밀려온 기억에서 추억이 회상되어 망가진 일상을 복구하고, 잊었던 과거를 복원하여 우리가 삶을 살아가도록 한다는 것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된 이야기가 아닐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