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는 시간에 길들여진 자신
이혼한 지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이상한 감정을 자주 느끼게 되었다.
고독이 편해졌다.
아무 말 없는 집이 익숙해졌고,
혼자 먹는 밥이 더 자연스러워졌으며,
누구의 발소리도, 전화벨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밤이
오히려 안심이 되는 시간으로 변해 있었다.
한때는 그 침묵이 참을 수 없이 무거웠다.
그 적막이 마음속을 갉아먹는 것 같아
TV를 켜놓고, 라디오를 틀고,
괜히 친구에게 쓸데없는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적막이 없으면
오히려 불안하다.
이혼 후 처음 혼자 살게 된 집은
작은 원룸이었다.
혼자 살기엔 꽤 아늑한 공간이었지만,
밤이면 그 작음이 오히려 더 외롭게 느껴졌다.
이불 속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지금 이 공간에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꾸만 되뇌는 버릇이 생겼다.
냉장고 소리가 크다 싶으면 놀랐고,
창문 바깥의 고양이 울음에도 잠을 설쳤다.
그만큼,
혼자 있는 것이 낯설고 무서웠다.
무섭다기보다…
비어 있는 느낌이 무서웠다.
그전엔
누군가의 말소리,
아이들의 발소리,
TV 소리,
누군가 밥을 먹는 소리가
항상 집 안에 가득했는데,
이제는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침묵이 대신했다.
그 침묵은
처음엔 견디기 힘든 고문 같았다.
혼자 사는 삶에 적응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적응’이라는 단어로
정리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적응은
외로움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일이 아니라,
그 외로움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어느 날
퇴근길에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늘 하루, 누구와도 대화를 안 했네.”
회사에서는 인사 정도만 오갔고,
카페에서 커피 주문한 게 유일한 말이었다.
그런 날이 반복될수록
예전엔 눈물이 났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
오히려
말을 하지 않는 하루가
피곤하지 않게 느껴졌다.
말로 에너지를 쓰지 않고,
그저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이젠 내게 가장 자연스러운 루틴이 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혼자 있으면 쓸쓸하지 않아?”
“집에 들어가면 허전하지 않아?”
처음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다.
지금의 나는
오히려 혼자 있는 공간이 위로가 된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집안에서 수건을 아무 데나 던져놔도 되고,
먹고 싶은 걸 마음대로 주문해서 먹을 수도 있고,
아무 이유 없이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어도
그 누구의 잔소리도 듣지 않는다.
그 무책임함마저도
지금은 나를 위한 자율로 바뀌었다.
가끔은
혼자서 영화를 보며 소리 내 울기도 한다.
그 울음이 누구에게 들리지 않는다는 안심이
오히려 나를 더 자유롭게 만든다.
이혼 후 몇 년간
나는 수많은 감정에 휩싸였다.
미련, 죄책감, 분노, 후회…
그리고 점점 더 커지는 공허함.
하지만 그 감정들을
억누르거나 지우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 감정들과
매일 마주 앉아보았다.
오늘은 외로움,
내일은 후회,
모레는 분노와.
그 감정들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시간들이
하나둘 쌓이면서
나는 조금씩 단단해졌다.
고독이 나를 찌르지 않고, 감싸기 시작한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은
나를 점검하는 시간이었다.
이제 나는 안다.
내가 어떤 음악을 들을 때 울컥하는지,
어떤 글귀에 마음이 흔들리는지,
어떤 음식에 가장 위로를 받는지.
혼자 있는 시간은
나를 외롭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가장 잘 돌보게 만든 시간이었다.
재미있는 건,
지금은 반대로
너무 북적이는 시간이 불편하다는 거다.
오랜만에 모임에 나가면
집에 돌아와 한숨부터 쉰다.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떠드는 동안에도
속으로는 ‘얼른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나.
언젠가 친구가 물었다.
“사람 만나는 게 싫어진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좋아. 다만… 고독이 익숙해졌어.”
이젠
혼자인 시간이 더 ‘안정’처럼 느껴진다.
그건
외로움을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외로움을 삶의 배경음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디에 있어도, 누구와 있어도
나를 조용히 따라다니는 그 감정.
그 외로움 덕분에
나는 내 마음을 더 잘 읽게 되었고,
다른 사람의 슬픔에도 조심스럽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이혼이 내 삶의 끝인 줄 알았다.
그 고독이 영원히 나를 잠식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고독은 나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고독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외로움이 싫다고 도망치기보다,
그 외로움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웠고
이제는 그 외로움 덕분에
조금 더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익숙해졌다는 말은
단지 체념이 아니다.
그건 받아들임이고,
성장이었다.
오늘도 나는 혼자다.
그러나 쓸쓸하지 않다.
이 침묵 속에서
나는 내 안의 소리를 더 분명히 듣는다.
그리고 그 소리는
조용히 나에게 말한다.
“괜찮아, 넌 잘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