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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벽돌 Mar 04. 2022

[한쪽 소설] 울보들아 들어라-18

마키아벨리가 고(告)함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남들 덕에 덩달아 유명해지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일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역사에서도 흔한 일이다. 한 인물이 행한 작은 일이 우리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아니면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에 영향을 끼쳤을 경우가 그러하다. 만약 그가 행한 일이 역사상 별 것 아닌 사건에,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인물에 기여를 하였다면 그는 어떤 사람의 기억에도 흔적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한 번 들어보겠다. 너희들은 기원전 1세기 로마 시대에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땅을 정복하고,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되건너 내란을 일으켰으며, 공화정이었던 로마의 정치 체제를 제정으로 변혁하고자 기도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문제를 하나 내겠다. 그를 원로원 회의장에서 암살한 자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그렇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이다. 


빈센초 카무치니가 그린 카이사르의 암살, 중앙에 쓰러져 있는 카이사르와 단검을 휘두르는 브루투스가 대조되어 보입니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카이사르가 마지막으로 남긴  "브루투스, 너마저" 란 말로 유명하죠. 그래서 기억하기 쉬운 건가?

다음으로 이것을 물어보자. 카이사르가 일으킨 내란에서 원로원의 입장을 대변하며 그에 맞서 대결한 이는 누구인가? 그는 이전에 지중해 해안의 해적을 소탕하고 로마의 동방을 평정하여 '로마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마그누스(위대한 자)'라는 호칭까지 선사받았다. 또한 카이사르, 크라수스와 함께 정권의 트로이카로서 제1 차 삼두정치를 열었던 사람이다. 그렇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이다. 마지막 문제이다. 그렇다면 파르살루스 전투, 탑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연달아 패하여 이집트에 몸을 의탁하려는 폼페이우스를 살해한 자는 누구인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 번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을 시킨 자는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이며, 그 일을 직접 행한 자는 역사의 어느 장에도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브루투스는 카이사르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을 시해하였기 때문에 기억되는 것이며 폼페이우스의 살해자는 반대로 역사에서 사라져 가는 그를 제거하였기 때문에 기억되지 못하는 것이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역사의 라이벌이었죠?


더 알기 쉽게 내가 살았던 약 백 년 후 너희들 나라에 벌어졌던 사건의 인물을 예로 들어 보겠다. 16세기 말, 전국 통일을 이룬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던 임진왜란에서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과 경쟁하고 충돌했던 장수가 누구인가? 바로 원균이다. 만약 이순신의 라이벌이 아니었다면 원균이라는 자가 기억이나 될 법 한가? 그는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에 대패하여 그동안 조선이 쌓아두고 훈련시켰던 해군 병력을 모두 수장시켜 버린다. 생각하기도 끔찍한 대패전의 장수를 누가 이름까지 기억한단 말인가? 아니 너무도 수치스러워 그의 이름을 접한 사람조차 고개를 가로저으며 기억하지 않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너희들 중에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흔치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그 못난 이가 너희들이 존경하고 추앙하는 이순신 장군을 방해하고, 건방지게도 우열을 다투려 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원균이라는 인물은 이순신이라는 위인(偉人)과 엮이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란 말이다.


이순신과 원균, 그들 또한 유명한 역사의 라이벌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나의 시대, 나의 나라로 돌아와 보자. 너희들은 메디치 가문의 이름을 왜 기억하고 있는가? 세계사에서 '메디치'라는 이름이 왜 알려져 있는가? 메디치가의 사람들이 알랙산더 대왕처럼 군대라도 이끌고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광활한 대륙을 점령하였던가? 아니면 오대양을 넘나드는, 육대주를 연결하는 뱃길이라도 개척하였는가? 그것도 아니면 당시 군소 국가들로 조각나 있었던 이탈리아 반도라도 통일하였는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이탈리아의 조그만 땅덩이, 토스카나 지방을 다스리던 피렌체 시의, 왕도 아닌 참주제를 행하던 귀족에 불과했다. 그런 그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중세의 암흑을 벗어나려 한 르네상스 운동이라는 것에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유명한 건축가, 화가, 조각가 등의 예술가들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도나텔로, 브루넬레스키, 보티첼리,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유럽의 새로운 새벽을 깨워냈던 이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독려하여 그들이 마음껏 날개를 펼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라는, 역사적으로 큰 움직임의 후원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한낱 조그만 귀족 집안인 메디치가의 역사를 공부하고, 그 가문의 위인들을 이해하고자 하며, 또 그들에게서 교훈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줄리아노 데 메디치도 그런 이유 때문에 기억될 사람이다. 줄리아노는 그의 생애에서 스스로 이룩한 것도, 사후에 업적으로 남길 만한 것도 없었다. 그는 그저 유명한 메디치가의 작은 도령이었고, 그 메디치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위대한' 로렌초의 동생이었으며, 메디치 가문이 위기를 맞았을 때에 교황으로서 가문의 명맥을 이어주었던 클레멘스 7세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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