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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벽돌 Mar 28. 2022

나의 소들을 소개합니다.-27

파란 벽돌과 만나다.-12

파란 벽돌과의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이미지 출처: Gettyimages

- 사람이란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때나 마칠 때, 혹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마치 의식처럼 일정한 행위를 반복하는 '루틴'이라는 것이 있다.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몇 년 전 은퇴한 박한이라는 야구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서 하는 루틴이다. 재미 삼아 한 번 보고 지나가자.

https://www.youtube.com/watch?v=fJNT6zvvMSA

- 그는 좋은 타격을 위해 양쪽 글러브도 다시 한번씩 조이고, 두 번 점프하고, 모자를 벗어서 머리 냄새도 킁킁 맡아보고,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팔과 왼 허벅지도 한 번씩 치고, 홈 플레이트도 한 번 따라 그려보고, 마지막으로 가짜 스윙을 몇 번 해본다. 투수의 공 하나하나마다 저러니 저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면 플레이 시간이 속절없이 길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나마 야구를 잘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더라면 등장할 때 마다 그 원성을 어찌 감당했으랴. 홈 팬들은 자기편이어서 별 불만이 없었다. 상대편 팬들이야 지켜보느라 속이 터졌겠지만 말이다. 나중에는 웬만한 팬들은 다 포기하고 저 선수만의 애교로 받아들였다.

네, 참 재미있기도 하고 장황하기도 한 루틴이네요.


- 좋은 의미의 '징크스'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미신 행위이지만 달리 보면 본격적인 업무의 시작 전에 긴장을 풀고 마음을 다잡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이 말했듯이 수술은 항상 긴장되고 스트레스받는 작업일 텐데 그것을 시작하기 전 당신도 당신만이 가지고 있는 루틴이라는 것이 있는가?

왜 없겠습니까? 없다면 이상한 것이지요. 


- 질문은 길었는데 대답이 너무 단답형이니까 질문한 사람이 뻘쭘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인터뷰에 성실하게 임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매 순간 성실히 임하고 있습니다. 다만 인터뷰어가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있습니다. 질문들이 미리 정리되어 있지 않고 너무 즉흥적입니다. 자신이 하게 될 인터뷰에 대한 준비도 덜 되어 있습니다. 혹시 어제 술 드셨나요? 자꾸 인터뷰를 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지 못하고 내용이 중구난방이 되도록 방치합니다. 그러니 글의 분량도 이렇게 하염없이 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던 수술장 CCTV 설치 문제는 어쩌고 갑자기 이 시점에서 외과 의사의 루틴에 대해 물어보는 것입니까?


-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반성하고 있다. 하지만 당신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 당신의 뇌구조는 도대체 어찌 되어 있는지 생각은 이리저리 날뛰고, 사고는 우주 끝까지 비약하며, 심지어 인간성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 사소한 지적에도 쉽게 토라지고 작은 일에도 스스로 흥분하여 완급 조절이 어렵다. 나도 이런 인터뷰이는 처음 상대해 본다. 그나마 내가 경험이 많기 때문에 당신을 이 정도 조절해서 어찌어찌 인터뷰를 끌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조심하기 바란다.

그럼 저의 루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 불리한 이야기가 나오니까 도둑이 제 발 저려 이야기 주제를 급전환하는 것인가?

전 수술장 호출이 오면 제 방에 걸려있는 기도문을 읽으면서 기도를 드립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아주 독실하지는 않으나 천주교 신자입니다. 과거에 수술 견학을 위해 가톨릭 대학 병원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거기 수술실 앞에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걸려 있더라고요. 수술을 위해 들어서는 의료진이 다시 한번 경건한 마음을 가지라고 하는 의미 같았습니다. 그 기도문이 하도 좋아서 복사해다가 제 방에 걸어 놓고 따라 하고 있습니다. 


수술 전 기도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신 천주여,

이제 OOO 환자의

수술을 하고자 하오니

저희들의 지식과 기술을 충분히 발휘하고

최선의 노력을 할 수 있는 

지혜의 능력과 건강을 주시옵소서.


저희의 능력으로 모자라는 것을

주님의 은총으로 보살펴 주시고

맡은 수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가진 분이라도 자신이 의지하는 신의 이름을 대신 넣으면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루틴 중 하나가 이와 같은 간단한 기도를 마치고 수술장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 기도문에 보면 "저희의 능력으로 모자라는 것을"이라는 문구가 보이는데 당신도 그런 것을 느낄 때가 있는가?

네, 항상 느낍니다. 수술은 아무리 잘 되고 있어도 불안한 것입니다. 다음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그것이 끝까지 아무런 이상 없이 무사히 마무리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다행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수술이 무난하게 진행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능력 이상의 절대자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수술 중에 발생하는 예상 밖의 상황이 닥치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최선일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시간 여유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단시간에 본능적으로 대처해야 환자에게 피해가 없다는 말이지요. 이런 경우 집도의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이럴 때마다 겨우겨우 임기응변으로 만들어 내는 방법이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 당시 여건에서는 거의 최선의 선택일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 능력 밖의 무엇인가를 인도하고 이끌어주시는 신의 도움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원래 무신론자였습니다. 하지만 의사가 되고 제 손으로 다른 분들을 치료해드리면서 신의 존재를 믿게 되었습니다. 신의 손이 나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잘 해낼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 음...... 당신이 이상한 방향으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독자님들도 많으니 너무 강요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다른 루틴은 없는가?

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하나 더 말씀드리면 저는 수술 전 환자분을 덮은 수술포에 십자가를 세 번 그립니다. 그리면서 각각 한 번씩 신께 도와달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니까 세 번 도와달라는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도감이 들고 이 수술은 나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뒤에 든든한 그분이 계시다는 자신감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조금 더 확신을 가지고, 침착하게 수술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저에게는 수술 전에 가장 인상적인 루틴이 된 것 같습니다. 저에게 배우고 나간 후배 의사들 중에는 이 '십자가 그리기'를  따라 하는 사람도 몇 명 있습니다. 심지어 그중에는 불교 신자도 있는데 말입니다. 뭐, 그렇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신은 위로 올라가다 보면 모두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니까요. 아참, 이런 생각은 신부님에게는 심하게 꾸중들을 만한 것일지도 모르지만요.

- 자꾸 '신'을 언급하다 보니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본 '지옥'이라는 드라마가 생각난다. 경건한 답변은 재미없으니 이제 그만하고 뭐 수술과 관련된 당신만의 징크스는 없는가?

속옷을 뒤집어 입는다든지, 안 갈아 입는다든지, 머리를 안 감는다든지, 수염을 안 깎는다든지, 뭐 그런 것들을 말하는 건가요?


- 그렇지, 그렇지, 그런 재미난 것들 말이다. 그런 징크스가 없는가?

미안하지만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저는 항상 청결하게 수술에 임하고 있습니다.


- 이 양반, 정말...... 참 결정적인 순간마다 실망스러운 구석이 많은 사람이군. 아, 오늘 인터뷰 정말 어렵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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