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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벽돌 Sep 27. 2022

나는 또 왜 이리 생겨먹었을까?-11

중년의 문제아

우리 병원에는 직원들끼리만 주고받을 수 있는 원내 이메일이 있다. 이 메일이 편한 게 상대방의 이메일 주소가 필요 없이, 소속과 이름만 안다면 바로 이메일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원래 원내 메일을 잘 활용하지 않고 자주 확인하지도 않는다. 주로 사용하는 것만 해도 2-3개의 일반 이메일 계정이 있어서 그것들을 챙기기에도 바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중요한 병원 업무가 원내 메일로 전달되는 경우가 있어서 그것과 아주 담쌓고 지낼 수는 없다. 보통은 1주일에 한 번 정도 챙겨보게 된다. 그날도 그랬다. 무심히 원내 메일 계정에 접속하였다. 언제나 그렇듯 병원의 중요한 행사 안내, 직원 대상 공지, 그리고 잡다한 행정 업무를 요청하는 메일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하품을 참아가며 마우스를 스크롤하던 중 언뜻 익숙하지 않은 발신자들이 보낸 메일들이 몇 개 보였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우선 그중 하나를 클릭해 열어보았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ㅇㅇㅇ에서 근무하는 ㅇㅇㅇ입니다. 불쑥 이메일 보내드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을 꼭 전해드리고 싶어서요. 이번 달 병원보에 실린 교수님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너무 재미있어서 그만 빵 터지고 말았습니다. 원래 글을 잘 읽지도 않고, 읽더라도 흥미를 잘 느끼지 못하는데 말이지요. 배어 나오는 웃음 속에 생각할 것도 만들어 주는 글이었어요. 처음으로 병원보 몇 부를 챙겨서 가족들과 친구들에게도 나눠주었습니다. 저처럼 굉장히 재미있어하더군요. 다음 회가 무척 기대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ㅎㅎㅎ"


오... 그것은... 그것은 나의 글을 재미있게 읽은 어느 직원이 보낸 응원 편지였다. 많지는 않지만 비슷한 메일들이 2-3통 더 와있었다. 오... 그때의 감동이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내 허접한 글이 처음으로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심금을 울렸다는 말이었다. 내 뭉뚝한 손으로 지어낸 두 페이지짜리 짧은 글이 어떤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고, 폭소를 터뜨리게 하고, 무언가를 되새기고 생각하게 하였다는 말이었다. 그렇게나 고대했던 반응이기는 했으나 그것이 실제로 벌어지니 얼떨떨했다. 


사실 심하게 설레발을 치기는 했으나 내 글이 소소하게라도 이런 반향을 일으키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주책맞게 안달을 부린 것은 마치 로또 복권을 사놓고 흥분해 있는 사람의 심리와 비슷했을 것이다. 목요일쯤 잘 생각도 나지 않는 이상한 꿈을 꾸고, 그것이 길몽이었다고 우기면서 복권 판매점에 가서 로또 복권을 몇 장 사는 사람 말이다. 그 번호가 자동 선택이든, 아니면 꿈속에 나온 조상님이 점지해 주신 것이든 상관없다. 그때부터 그는 가슴 두근거리는 희망을 경험한다. 2, 3등은 안중에도 없다. 정확히 814만 5060분의 1의 확률을 뚫고 1등 당첨이 될 것만 생각한다. 



"당첨금이 수십 억 원은 될 텐데 그걸로 뭐할까? 일단 매끈한 외제차 하나 사고, 집안의 가전제품도 쌔끈한 것들로 다 바꿔야겠지? 아참, 그동안 군침만 흘리던 오디오 세트도 마련해야겠다. 집사람 좋은 옷도 몇 벌 해주고 명품백도 몇 개 쥐어주고,... 음... 그것들을 입히고 들려서 제일 비싼 레스토랑으로 데려가자. 럭셔리한 만찬도 즐겨봐야지.... 남은 돈으로는 뭘 할까?... 그렇지, 은행 대출도 싹 갚아야지.... 하하하 정말 기대된다."


희망에 부풀어 있다고 저 사람이 1등 당첨을 정말로 기대하고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혼자만의 행복한 망상일 뿐이고, 시어버린 김칫국을 미리 사발째 들이키는 자아도취일 뿐이다. 나도 그러하였다. 내 글이 직원들의 열렬한 반응을 일으킨다면 어찌할지 상상하며 들뜨기는 했었지만 그것은 복권 당첨처럼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먼 기대감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급하게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흥분해서 떨리던 손으로 옮긴 컵이었기 때문에 뜨거운 액체가 입대신 코로 넘어갔다. 역류한 커피는 앞섶으로 쏟아져 내렸고 나는 새로 갈아입은 가운을 버렸다. 그래도 황홀경은 멈추지 않았다. 콧노래는 절로 나왔고 창밖의 세상은 화려했다. 방을 나왔다. 하릴없이 1층 로비를 좀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알아주고 나의 글을 사랑해주는 직원들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에게 응원 메일을 보낸 직원들을 찾아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까지는 얼굴도 잘 익히지 못했던 직원들이 모두 애틋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들 틈을 잠시 거닐어 보고 싶었다. 설레는 기분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교수님 몇 분이 먼저 타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반갑게 맞이 했다. 그런데 그날의 인사는 평상시의 상투적인 것이 아니었다.


"ㅇ교수, 병원보 글 잘 읽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재미있게 썼대요? ㅇ교수에게 그런 재주가 있는지 몰랐네요. 다음 회가 벌써부터 기다려져요. 하하하."


오... 교수님들마저.... 내 응원단은 여기에도 있었다. 몇 주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다가 어떻게 갑자기 하루아침에 이런 찬사들이 쏟아지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때 우주선도 아닌 엘리베이터 안에서 정확히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였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내렸고 계획했던 대로 1층 로비에 들어섰다. 그 와중에도 손은 쉬지 않았다. 나는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는 함께 기뻐해 주는 듯했으나 왠지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그동안의 무반응에 충격을 받은 내게, 있지도 않은 일을 떠벌이는 허언증이 생겼거나, 아니면 누군가 마지못해 한 인사말을 침소봉대하여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계속)


*표지 이미지 출처: 서강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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