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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지혜 Nov 23. 2022

마침표를 정확히 찍는 일

내게 있어 수사와 재판의 의미

오늘은 꽤 예전에 처리했던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로부터 안부 연락이 왔습니다.

바쁜 와중에 그 발신자 이름을 보고 사실 망설였습니다. 받을까 말까. 피해자 입장에서 사건을 처리했던 수사 담당자에게 연락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받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제 몹쓸 호기심이었지만, 51:49로 49 지분만큼의 책임감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책임감이라 해서 뭔가 (타인의 슬픔을 기꺼이 끌어안아주는) 거룩한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했던 사건의 완성도에 대한 책임감이랄까요? 결국 저를 위한 것이지요. (이게 저라는 인간입니다.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건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니까요.)  


"군검사님... 잘 지내셨어요?"  


예전보다 물기가 걷힌 듯한 목소리. 말의 끝자리를 길게 늘이는 말투는 여전하다, 생각했습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반가운 마음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면서도 마냥 반가워만 하기가 어쩐지 곤란합니다. (저와 동갑내기이지만, 친구는 아니기도 하고...) 목소리에서 티가 날까 얼른 큼큼, 가라앉은 목을 다듬는 척을 하고, 저는 잘 지낸다, 어찌 지내시냐. 인사를 건넵니다.


예전의 그녀는 어딘가로 떠내려가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와 한참을 통화하면, 저도 그 물에 점점 젖어들어갑니다. 감정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일보다 더 많은 노력을 들여야 했습니다. 감정도 전염됩니다. 특히 우울한 감정은 더 잘 전염됩니다. 제 안에도 많이 뿌리내리고 있는 감정이고 그녀가 했던 경험은 언젠가 제가 했던 경험이고, 앞으로 언젠가 또 하게 될 경험이기 때문이겠지요.


"제 사건... 대법원에서 2심에서 나온 그대로 확정됐습니다. 이미 알고 계실지 모르지만, 그걸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아, 확정이 됐군요."


제 감정도 생각도 알 수 없는, 그저 그녀의 말을 동어 반복했습니다. 저는 수화기 너머로 나 한 마디, 너 한 마디를 주고받는 그 짧은 순간. 기뻐야 할지 슬퍼야 할지, 그녀의 감정을 짐작해보다 어느 쪽을 선택할 타이밍을 놓쳐 버립니다. (사실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이것저것이 섞여있을 테니)


"네. 이제 다 끝났습니다."


말의 끝자리를 길게 늘이는 와중에도 끝났다는 말 끝은 한 톤 올라가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팔랑거리며 올라가 있지는 않고 어딘가 지긋이 눌린 듯하지만 올라가있기는 올라가 있는 정도… - 제가 지금 뭐라는 걸까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저의 어떤 반응을 원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 말을 해도 되는 누군가에게 하고 싶었던 거라고요. 저는 그 순간 수화기 너머에 고요히 있어주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웠습니다. 한 톤 올라간 그분의 말끝에 마음이 가벼웠고, 어쨋든 결과에 만족하는 듯한 그분 덕분에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수사와 재판이라는 일에 관해 종종 생각합니다. 수사와 재판은 마침표를 찍는 일입니다. 한 때는 당사자들의 마음과 감정을 어루만지는 일이라 생각한 때도 있었고,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정의라는 관념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 생각한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사와 재판은 마침표를 찍어야 할 위치에 정확히 찍는 것입니다. 가장 정확한 위치는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관련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가능한 정위치에 마침표를 꾹 눌러 찍는 일. 그게 수사와 재판에 종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건 한 건에 뼈를 갈아 넣을 이유입니다.


그분에게 사건 직후부터 겪던 트라우마 증상은 나아졌는지, 잠은 잘 주무시는지, 일상의 의욕은 돌아왔는지, 더 이상 자신을 탓하지 않는지... 묻고 싶었지만, 마침표를 찍는 데에 한 귀퉁이 기여한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마침표를 찍는 사람이므로.


저는 여전히 기꺼운 마음으로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낫다고 단언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죽지 않는 것으로 지금을 사는 선택을 할 뿐입니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나아서 사는 것을 선택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에게 일어난 일을 없던 일처럼 만들어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그런 게 아니지요. 지금을 사는 그런 선택들이 쌓이고 쌓여 세월이 되고 어느 만큼의 삶이 되겠지요.


그분에게 이번 마침표는 또 한 번 지금을 사는 선택을 하게 하겠지요. 그만큼의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제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할 수가 없습니다. 제 생일에 해맑게 웃어 보일 수가 없어요. 생일을 축하해주는 누군가를 바라보면 약간 방귀 참는 듯한 표정을 지을 뿐이지요.(이 지면을 빌어 그 모든 분들께 심심한 사과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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