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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범한지혜 Jan 26. 2023

수사기관에 다 진술했는데 법정에 또?

법을 알아야 하는 이유

범죄 피해를 당하고 나서 수사기관에서 피해자로 조사를 다 받았는데, 증인으로 법정에 출석하라는 '증인 소환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경찰서나 검찰에 가서 진술하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법정이라니…?

 가해자와 마주칠까 봐 걱정도 되고, 낯선 환경에서 말실수할까 걱정도 되고…

더구나 성범죄이거나 끔찍한 범죄를 당하신 경우에는 시간이 조금 지나 안정되었는데 그때 일을 다시 생각하는 것조차 싫을 겁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또 증인으로 오라는 건가요?

꼭 출석해야 할까요?


오늘도 결론부터,

네. 꼭 출석해야 합니다.

가해자를 처벌받게 하고 싶다면!

(이 경우는 대체로) 가해자가 재판에서 자기 잘못을 부인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형사소송에는 “공판중심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공판을 중심으로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이 나온 배경이 있습니다.


범죄는 공판정 밖에서 발생합니다. 범죄에 대한 수사도 공판정 밖에서 시작하지요.

결국 범인을 공판정의 판사 앞에 앉혀 놓기까지의 과정이 수사이거든요.


판사 앞에 앉기 전까지 확보된 증거를 종합해서 검사가 범인을 판사 앞에 앉혀두면(=기소하면)

판사가 그 증거들을 실눈 뜨고 바라봅니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그래서 의심 가득한 눈이지요.

판사는 그 증거를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대신 그 증거를 모두 공개된 공판정에 펼쳐 둡니다.

수사기관에서 압수한 범행 도구도 꺼내어 판사의 두 눈으로 확인합니다.

감시 카메라에 범행 장면이 찍힌 영상이 있다면 영상도 재생합니다.


수사기관이 누군가의 진술을 기록한 “조서”도 펼쳐야겠지요.

하지만 압수물이나 영상과 펼쳐놓는 방식이 좀 다릅니다.

조서는 그 문서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그 문서의 내용을 보는 거잖아요.


수사기관의 귀와 눈을 거쳐 생산된 누군가의 진술을 판사는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 있잖아요. 누군가의 말을 들어서 전할 때, 전하는 사람의 생각과 말투가 덧입혀질 수밖에 없지요. 또는 수사 중에 제대로 진술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완곡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이를테면 “고문”? 이런 거 말입니다. 과거 우리 역사에서도 있었지요. )


이것을 형사소송에서는 “전문증거의 증거능력 제한”이라 합니다.

(말이 좀 어렵죠? 저도 알면서도 어려워요.)


수사기관이 누군가의 진술을 듣고 기록한  “조서”같은 서류 증거는 전문증거입니다.

판사는 이 조서에 있는 수사기관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고, 공판정에서의 진술자의 말을 들어 보고 그 수사기관의 말(=조서)을 믿을지 말지 결정합니다. 


물론 피고인이 공판정에서 자기의 범행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이 수사기관에서 한 자신의 범행에 관한 진술을 모두 인정하는 경우에는 판사도 그 증거에 대해 문제 삼지 않고 그대로 인정합니다.


하지만 피고인이 공판정에서 자기의 범행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수사기관에서 한, 자신의 범행에 관한 진술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논리적이겠지요?

그런 경우 판사도 그대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조서를 작성한 원래의 진술자를 공판정에 불러 그 사람의 입으로 그 조서가 “내가 조사받으면서 한 말이 그대로 적혀 있는 조서가 맞습니다.”라고 인정하면, 그제야 판사는 그 증거를 인정합니다.


형사소송법 제312조(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의 조서 등)
④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이 피고인이 아닌 자의 진술을 기재한 조서는 적법한 절차와 방식에 따라 작성된 것으로서 그 조서가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 앞에서 진술한 내용과 동일하게 기재되어 있음이 원진술자의 공판 준비 또는 공판기일에서의 진술이나 영상 녹화물 또는 그 밖의 객관적인 방법에 의하여 증명되고, 피고인 또는 변호인이 공판 준비 또는 공판기일에 그 기재 내용에 관하여 원진술자를 신문할 수 있었던 때에는 증거로 할 수 있다. 다만, 그 조서에 기재된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하에서 행하여졌음이 증명된 때에 한한다.


피해자가 수사기관에서 모든 진술을 다 했는데도 또 공판정에 나가야 하는 이유가 설명되었을까요?


이러한 과정에 출석하지 않으면,
피고인은 무죄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피해자의 진술이 그 사건의 거의 유일한 증거이거나
매우 중요한 증거인 경우에는 정말 그렇습니다.


다시 기억을 떠올리는 게 힘든 일이지만, 거의 다 왔습니다.

피해자가 진술을 해야 하는 경우는 이제 마지막일 겁니다.

(피고인이 항소하는 경우라 해도 1심에서 피해자의 증인신문이 있었다면 2심에서 다시 피해자를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형사소송절차가 너무 피고인만을 위한 절차로 설계되어 있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내가 피해자인 경우 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조금 더 큰 마음으로 소송제도를 바라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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