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부족으로 의대 정원수를 매년 2000명 늘리는 문제로 의사들과 정부의 갈등이 매일 기사로 보도되고 있네요.
지금은 의사들, 특히 대형병원의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진료를 거부하여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생기고 있다고 합니다. 정부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병원을 떠난 의사들에게 어제 업무개시명령을 발령했다고 하지요. 그래도 의사들은 병원에 복귀하지 않고 있고요. 부디 심각한 상황에 처하는 환자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정부는 의사들에게 진료 현장에 돌아올 것을 촉구하면서 의사들의 면허 박탈까지 언급하며 각종 법적 조치를 단행하겠다고 대응하고, 의협 역시 법적 대응을 할 것이며 정부의 겁박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법원 판결이 필요한 일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지켜보다 보니 변호사로서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이 눈에 띄더군요. 정부가 의사들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의협의 발언입니다.
의사들에게는 사직하고 직업을 수행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표현이겠지요? 의사들의 직업의 자유만 놓고 보면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의 기본권과 충돌하는 상황이라면 다릅니다. 의협의 가치 판단에는 그 중요한 부분이 어디로 빠져버렸습니다.
내 기본권이 누군가의 기본권과 충돌하는 경우에는 어느 기본권이 우선하는지의 판단이 필요합니다.
이 경우 의사들의 진료하지 않을 자유, 즉 직업선택의 자유는 국민의 진료받을 권리, 즉 생명권 또는 건강권과 충돌합니다. 그것도 상당히 많은 국민들의 생명권과 충돌합니다. 어느 기본권이 충돌한다고 봐야 할까요?
딱 이 경우에 들어맞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없지만, 우리 의료법 곳곳에 이미 국민의 생명권이 의료인의 직업의 자유에 우선한다는 취지가 드러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단 의료인이나 의료기관 개설자는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를 거부하지 못합니다. 즉, 의사나 병원은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를 거부하지 못합니다.
의료법
제15조(진료거부 금지 등) (1) 의료인 또는 의료기관 개설자는 진료나 조산 요청을 받으면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지 못한다.
(2) 의료인은 응급환자에게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최선의 처치를 하여야 한다.
의사들이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를 거부하면 1년 이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 벌금으로 형사처벌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진료업무를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의료법
제59조(지도와 명령) (1) 보건복지부장관 또는 시ㆍ도지사는 보건의료정책을 위하여 필요하거나 국민보건에 중대한 위해(危害)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으면 의료기관이나 의료인에게 필요한 지도와 명령을 할 수 있다.
(2) 보건복지부장관, 시ㆍ도지사 또는 시장ㆍ군수ㆍ구청장은 의료인이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를 중단하거나 의료기관 개설자가 집단으로 휴업하거나 폐업하여 환자 진료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거나 초래할우려가 있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그 의료인이나 의료기관 개설자에게 업무개시 명령을 할 수 있다.
(3) 의료인과 의료기관 개설자는 정당한 사유 없이 제2항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업무개시명령도 거부하면 3년 이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 벌금으로 형사처벌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의료인이 진료 중단한 데에 정당한 사유가 있는지 없는지, 그에 따라 정부의 업무개시명령이 정당한지 아닌지는 구체적 사안에서 법원의 판단을 받아보아야 할 것이지만, 일단 의료법 규정상 그러합니다.
이렇듯 의료법은 이미 오랜 전부터 의사들은 자유롭게 직업선택의 자유를 행사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이러한 요건 하에 의사 너희들은 직업선택의 자유가 억제될 수도 있다고 법이 미리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느 일반적인 직업과 비교해 보면 이건 정말 신기한 규정입니다.
김밥가게 사장님에 대해 “정당한 사유 없이 김밥 팔기를 거부하지 못한다.”라고 법에 규정할 수 있을까요? 사장님의 김밥 판매 거부가 손님의 김밥 사 먹을 권리 침해라고 볼 수 있나요? 사장님의 김밥 판매의 직업선택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김밥은 다른 곳에서 먹어도 되고 김밥 아닌 다른 메뉴를 먹어도 침해되는 이익이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과 건강은 어떤가요? 그것도 의사 한두 명이 아니라 일국의 의사 수천 명이 일시에 모두 진료에서 손을 뗀다면 국민들의 생명과 건강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이 생깁니다.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생기지요. 침해되는 이익이 상당히 큽니다.
반면 의사들의 직업 선택의 자유는 지금 당장 의업을 그만두지 않더라도 침해되는 이익이 크지 않습니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달성하려는 목적(의사 수 증원 저지)은 여기에 고려해야 하는 이익이 아닐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의업의 특수성입니다.
의업은 김밥 판매와 다릅니다. 사람의 생명과 건강이라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양보할 수 없는 가치를 추구하는 직업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의사들은 의업을 선택하면서 자신들 직업의 특수성을 알지 못하고 선택한 것 같습니다.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의업을 시작하는 의사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장면을 본 적 있습니다. 아늑한 조명에 엄숙한 분위기 속 나지막한 그들의 선서문 낭독. 근사하다 못해 거룩한 마음이 들더군요. 순간 믿음직한 그들에게 내 생명과 신체를 맡겨도 될 것 같은 안식과 평안이 느껴지더군요.
그 선서는 그 순간 연출된 것이었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