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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 Jul 05. 2024

나는 뉴진스가 싫다

대중문화비평


버니즈 캠프


        얼마 전 도쿄돔에서 뉴진스의 팬미팅인 ‘버니즈 캠프’가 열렸다. 이 행사에서 하니가 커버한 ‘푸른 산호초’가 일본과 한국 모두에서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푸른 산호초’는 80년대 일본의 호황기를 대표하는 ‘국민가요’란다. 아직 앳된 이국 소녀의 모습을 통해 재현된 과거에 일본인들은 거부하기 힘든 향수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이 3분간의 무대 동안 관객들은 떼창으로 도쿄돔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하니의 ‘푸른 산호초’는 뉴진스의 성공적인 일본 진출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다. 이처럼 관객의 향수를 자극하는 방식은 민희진이 뉴진스를 처음 선보일 때부터 줄곧 고수해 온 전략이었다.



당신들의 10대는 어땠나요?


        뉴진스를 처음 세상에 알린 뮤직뱅크의 ‘Attention’ 무대를 돌아보자. 어떤 모습이 가장 선명히 떠오르는가? ‘옅은 화장의 10대 소녀들이 흩날리는 윤기 있는 검은 생머리.’ 아마 많은 사람이 공감할 것이다. 이 무대가 화제가 된 후, 내 친구 중 몇몇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짙은 화장과 노출이 많은

옷이 아닌, 저 나이대에 어울리는 모습이라서 좋아.” 옅은 화장과 긴 생머리, 그리고 편안해 보이는 옷은 이처럼 대중의 향수를 자극하며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뉴진스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이 30대 이상의 대중이었다는 점은 민희진의 ‘향수 마케팅’이 효과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향수 마케팅’의 성공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다음 질문을 통해 드러난다. “당신들의 10대는 정말 그런 빛이었나요?”


        30대를 대표하여 말하건대, 우리의 10대는 ‘뉴진스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난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교복은 항상 줄여서 입고자 했으며, ‘구레나룻’은 조금이라도 더 길게 남기고 싶었고, 검은 생머리보다도 파마나 염색을 동경했다. BB크림과 틴트는 불티나게 팔렸다. 당시의 우리를 보며 어른들은 이렇게 말했다. “학생은 학생다울 때 가장 예쁜 거다.”, “너희는 어려서 피부가 좋아, 화장 안 한 맨얼굴이 가장 예쁘다.” 하지만 그런 말들이 가슴에 와닿았을 리 만무하다. 그렇게 10대를 지나 보낸 우리는 뉴진스를 바라보며 지난 시절을 더듬는다. 이제 우리는 이해한다. 그때 어른들이 말했던 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하지만 이제는 떠나보낸 그 시절의 빛을 화면 속 아이들에게서 찾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래 이게 ‘젊음’이야!”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닿을 수 없어 더 아름다운


        우상이라는 뜻을 지닌 ‘idol’은 라틴어 ‘idola’에서 비롯했고, 이는 ‘유령’, ‘환영’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εἴδωλον’에서 유래했다 한다. 단어가 지닌 근원적 의미처럼 뉴진스는 진정한 의미에서 어른들의 ‘아이돌’이 되었다. 뉴진스는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우리의 어린 시절에 대한 아쉬움이자 그리움으로서, 동시에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던 편집된 과거의 환영으로서 우리와 마주한다. 멀리 떠나보낸 만큼이나 흐릿해진 과거는 새로 덧칠한 그림의 후광으로 남아 아련한 아름다움이 된다. 이것은 매혹적인 환각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버니즈 캠프’는 민족적 열기로 가득했던 ‘집단최면의 장’이라 할 만 하다.


“나 진짜 똑같이 할 거야.” 공연을 마친 후 팬들과의 라이브 방송에서 하니는 원곡자인 마츠다 세이코의 동작 하나하나를 똑같이 따라 하고자 노력했다 밝혔다. 각고의 노력 끝,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을 줄 알았던 기억을 높은 해상도로 재현한 열아홉 소녀의 모습은 손 닿을 수 없는 환상처럼 처연하게 아름다웠다. 물론 나는 일본 대중에게 80년대 황금기가 갖는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다만 ‘푸른 산호초’를 둘러싸고 퍼지는 목소리 속 짙은 향수를 통해서나마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이 목소리 속에는 황금기를 풍미했던 중장년층의 빛바랜 추억과, 저성장 시대의 일본을 목도해온 90년대 이후 세대의 막연한 동경이 함께 얽혀있다. 이렇게 뉴진스는 많은 일본 대중에게도 어엿한 ‘아이돌’이 되었다.



좋은게 좋은 거 아닌가요?


        한국에서, 그리고 일본에서도 뉴진스는 그들을 통해 대중이 스스로 과거를 향수하도록 이끈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생생한 ‘시대감’에 대중은 자신을 던져 넣는다. 멤버 개개인의 서사보다도 앞에, 대중이 공유하는 시대의 서사가 위치한다. 계절에 맞춰 털색을 바꾸는 토끼처럼, 뉴진스는 시대에 맞는 옷을 갈아입는다. 따라서 뉴진스가 대중을 이끄는 힘은 대중이 한 시대를 향수하는 정도와 정비례한다.


        우리는 어째서 아름답게 편집된 과거의 환영에 이토록 무력하게 매료될 수밖에 없는가? 어느 순간부터 과거는 ‘복고’, ‘뉴트로’, ‘Y2K’같은 단어들로 매해 이름을 조금씩 바꾸어가며 트렌드의 중심에서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각종 추억의 질료로 매개되는 반사적 향수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우리 사회 전반에

드리워있다. 때때로 지난 과거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나 다가올 미래보다 더욱 매혹적인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는 어쩌면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집단적 신경증의 존재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정신과 진료를 받은 환자의 수는 2017년 335만 명에서 2022년 459만 명으로 37% 증가했다. 우리는 전에 없이 신경증과 정신증이 만연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재난 상황이라 할 만 하다. 2008년 캐나다의 경제학자인 나오미 클라인은 ‘자연재해나 위기, 전쟁을 돈벌이 기회로 삼는 자본주의’를 ‘재난자본주의’라 칭하며 비판하였다. 우리는 이에 명시된 ‘자연재해’나 ‘전쟁’과 같은 유물세계의 위기뿐 아니라 정신세계의 위기 역시 심각한 재난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유물세계의 재난이 우리의 생물학적 생존을 위협한다면, 정신세계의 재난은 우리의 실존적 생존을 위협한다.


        나는 뉴진스가 싫다. 다시 정확히 말 하자면, 현대 사회를 뒤덮은 신경증과 이로부터 촉발되는 인간 실존의 재난을 토양 삼아 꽃피우는 ‘정신-재난자본주의’의 구조가 꺼림칙하다. 물론 일상생활에 지친 누군가에게 하니의 깨끗한 목소리로 퍼져나가는 ‘푸른 산호초가’ 잠시의 휴식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무기력한 현재와 불안한 미래를 앞에 두고 우리의 실존을 안락으로 포장된 과거에 정주토록 이끄는 자본의 힘을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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