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 속에서 길어올린 합격의 순간
“WHO 인턴십을 마치고 귀국한 나는, 행정고시라는 새로운 도전에 뛰어 들었다. 낯선 길이었지만, 스스로 기한을 정해 버텨보기로 마음먹었다”
행정고시에 합격하기까지 약 3년 동안 본가와 신림동을 오가며 생활했다. 신림동 고시촌에서 원룸을 구해 눈을 떠 하루를 마무리할 때까지, 그야말로 하루 종일 앉아 책을 보거나 강의를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과 입시 준비로 단련된 ‘엉덩이 체력’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수험 적합성을 높여 효율적으로 공부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기본적인 공부 시간 확보는 필수라고 생각했다.
5급 공채는 1차(PSAT), 2차(논문형), 그리고 면접으로 구성된다. 1차 PSAT은 언어논리·자료이해·상황판단 영역과 헌법(P/F) 객관식 시험이다. 2차는 서술형 시험으로, 일반행정 직력 기준으로 행정법·행정학·정치학·경제학 4과목이 필수였고, 나는 선택과목으로 정보체계론을 택했다. 평소에는 2차 시험 준비를 위주로 하고, 1차 시험이 다가올수록 PSAT 준비 비중을 늘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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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1차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였다. 다음 시험까지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큰 압박이었다. 주변에서 2차시험을 준비하는 동료들을 보며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 정신적으로 힘들어 본가로 돌아가 재충전하며 공부했다. 1차 시험은 공부를 하는 만큼 성적이 눈에 띄게 오르지 않는 경우가 많아 더 힘들었다. 반대로 마지막 해에는 “이번에도 떨어지면 인연이 아니다”라고 마음을 내려놓자, 오히려 좋은 성적이 나왔다.
경제적 부담도 컸다. 생활비와 학원비를 부모님께 의지해야 했기에 아껴 써야 했다. 인터넷 강의는 2~3명이 함께 공유해 수강했고, 답안 연습을 하다 보면 제트스트림 볼펜 한 통을 일주일도 안 돼 다 쓰기 때문에 리필심을 사서 교체해가며 사용했다. 식사는 대충 과자로 때우기 일쑤였고,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공부하는 것이 작은 사치였다.
체력 관리는 뒷전이었다. 먹는 것이 부실했고 운동도 거의 하지 않았다. 공부기간이 더 길어졌다면 건강 문제로 중도에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합격 후 건강 검진을 받았을 때 갑상선 기능 저하, 부신 기능 저하, 장 문제 등 적신호가 켜져 치료를 받았다. 지금 돌아보면 수험생에게 ‘건강관리’는 필수 과목이었다고 생각한다. 억지로라도 잘 챙겨 먹고 운동해야 신체적·정신적으로 버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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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촌 생활은 외로움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이공계 대학 출신으로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경우가 흔치 않아, 처음에는 지인도 없이 혼자 공부하고 정보를 찾아야 했다. 스스로를 고립하는 방식으로 공부했는데, 합격에는 도움이 되었는지 몰라도 정신 건강에는 좋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계속 의지해야 한다는 점도 마음에 부담이 되었다.
그러던 중, 고시촌에서 우연히 대학 동창을 만나게 되었고, 그가 지금의 남편이다. 함께 스터디 그룹을 꾸려 답안 연습을 하고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공부하니 훨씬 도움이 됐다. 공부뿐 아니라 멘탈 관리에도 큰 힘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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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논문형 과목의 핵심은 양을 줄이고 답안에 현출하는 연습이다. 대학 전공 수준의 다섯 과목을 깊이 파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공부량을 늘리기보다 답안에 현출할 수 있는 만큼만 압축하는 것이 필요했다. 즉, 답안 연습을 하면서 시험장에 들고 갈 ‘총알’을 계속 줄여나가는 전략이었다.
• 행정법
행정법은 문제에서 쟁점을 추출하고, 쟁점별 주요 판례와 학설을 정리해 사안에 맞게 포섭하면 된다. 다양한 교수저를 비교하며 학설을 깊게 파고드는 것은 불필요했다. 쟁점을 정확히 잡고 판례 입장과 주요 학설 정도만 외우면 충분했다. 고시촌 강의도 마찬가지로, 시험이 다가올수록 양을 줄여주는 강사를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 소위 1타 강사들은 불의타 대비를 위해 지나치게 디테일한 부분까지 다루는데, 수험을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 경제학
경제학은 내가 특히 약했던 과목이다. 핵심은 문제풀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를 반복해서 풀면서 모르는 개념을 다시 찾아 이해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경제학은 수학처럼 답이 맞으면 점수가 나오는 과목이므로, 두껍지 않은 문제집(예: 윤지훈 저 120제)을 골라 회독수를 늘리며 반복 연습하는 방식이 좋다고 생각한다.
• 정치학·행정학·선택과목(정보체계론)
논문형 과목은 흔히 ‘글빨’이 좋으면 유리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수험 답안은 창작이 아니라 기술적 글쓰기다.
논문형 과목은 공부 범위가 끝없이 넓지만, 어느 주제에도 통용되는 굵직한 개념을 암기해 답안에 끼워 넣는 방식이 효과적이었다. 예를 들어, ‘공공성’, ‘효율성’, ‘가외성’과 같은 기본적인 가치의 개념을 익혀두면, 다양한 문제에 응용할 수 있다. 답안이 막힐 때에도 이런 개념을 가져다 쓰면 논리를 전개할 수 있다.
나는 합격생 과외를 받으며 이 공부법을 배웠다. 단기간 공부 후 논문형 과목 고득점으로 합격한 분이었는데, “답안은 창의가 아니라 기술”이라는 점, 그리고 “어떤 문제에도 끼워 넣을 수 있는 개념 세트”를 강조했다. 나도 그대로 받아들여 공부했고, 실제로 논문형 과목에서 고득점을 받아 2차 시험에 한 번에 합격할 수 있었다.
정리하면, 행정고시는 수험이기 때문에 학자가 되는 공부와는 정반대다. 답안에 현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식을 효율적으로 정리해 반복 연습하는 것이 합격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챗지피티 같은 툴도 있으니 개념 정리와 답안 연습을 훨씬 똑똑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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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시험은 가채점에서 합격선을 웃돌아 발표일을 초조하게 기다리진 않았다. 2차는 서술형이라 점수를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답안을 복기했을 때 기대가 있었다. 발표일까지 라섹 수술도 하고, 테니스도 치고, 아르바이트도 하며 몇 년 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합격 발표날, 나는 휴대폰을 스터디메이트(지금의 남편)에게 맡겼다. 합격 문자 수신이 너무 떨려서 직접 확인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둘 다 합격 문자를 받았다. 근처 식당에서 삼겹살을 맛있게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마음 속에서 큰 짐이 내려가는 듯했다.
3년의 수험생활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지만, 마음고생은 깊었다. 날아갈 듯한 기쁨보다는 “인생의 한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그렇게 3년간의 수험생활을 끝내고 행정고시에 합격하면서, 나는 중앙부처 행정사무관으로 발을 들이게 되었다. 이제는 공부가 아닌, 실제 국가 행정을 담당하는 자리에서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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