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열정과 과중한 업무 사이에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기, 보건복지부 시보 생활은 보람과 배움으로 가득했지만 동시에 과중한 업무와 번아웃의 경계를 실감하게 한 시간이기도 했다.
5급 공채 합격생은 정식 부처 배치에 앞서 연수 과정을 거친다. 그중 ‘지방연수’라 불리는 과정은 원래 지자체에서 근무 경험을 쌓는 자리이지만, 내가 연수를 받던 2020년은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시기였다. 이례적으로 보건복지부에서 스무 명 이상의 합격생이 연수를 받게 되었고, 나는 그곳을 지원했다. 합격 당시 지망했던 부처 중 하나이기도 했기에, 미리 업무 경험을 쌓아보고 싶다는 기대가 컸다. 그렇게 시작된 4개월의 시보 생활은 내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나는 보건의료정책실 내 한 부서에 배치되었다. 원래 사무관 네 명이 각각의 계를 맡아야 하지만, 코로나 대응 TF로 인해 인력이 빠져나가며 당시 부서에는 시보인 나를 포함해 두 명뿐이었다. 나는 전임자가 질병휴직으로 장기간 비운 자리를 이어받았고, 산더미처럼 밀린 업무를 당장 처리해야 했다.
생명윤리법 개정, 고시 개정, 생명윤리 기본정책 수립, 유전자 검사 관련 제도 운영,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운영 등 업무를 맡으며, 두 명의 주무관과 호흡을 맞추어야 했다. 낯선 분야였지만 실무에 깊숙이 들어가다 보니 금세 익숙해졌고, 보람과 긴장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생명윤리법 개정안은 국회에 계류 중이었으나 갑작스럽게 급물살을 타며 본회의까지 빠르게 진행되었다. 입법 과정에서 정부 담당자는 국회 위원회 심사 과정마다 입법조사관과 긴밀히 소통해야 한다. 실무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자료를 숙지하고 즉각 답변을 준비하느라 고군분투했다. 야간이나 주말 아침 할 것없이 조사관으로부터 전화가 오면 바로 대응해야 했다.
DTC(소비자 직접 의뢰) 유전자 검사는 생명윤리법 개정의 핵심 내용 중 하나였다. 세 개 업체가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나는 시범사업 운영과 고시 개정을 통한 검사 항목 확대에 참여했다. 시범사업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받은 업체로부터 민원을 받기도 하는 등 규제샌드박스 과제에도 포함된 사안이라 산업계의 규제 완화 요구가 거셌다. 국무조정실 회의에 참석해 부서 입장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 과정을 통해 국회와 협업하는 방식, 규제정책의 긴장감, 그리고 정부가 산업계와 마주하는 방식을 몸소 배울 수 있었다.
상임위 회의 중, 예상 질의서에 없던 돌발 질문이 나오자 휴대폰으로 전화와 메시지가 동시에 쏟아졌다. 즉각 답변을 전달했지만 현장에 닿기까지 시간이 걸려 모두가 당황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현장에서 순발력있게 적절히 답변해 큰 문제는 피할 수 있었다.
또 다른 기억은 사유리 씨의 ‘비혼 출산’ 이슈였다. 언론 보도가 쏟아지며 기자들의 전화가 빗발쳤고, 출장 중이던 나는 급히 복귀해 대응에 나섰다. 법 자체가 비혼 출산을 금지하지는 않았으나, 학회의 지침이 의료 현장을 사실상 제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민한 주제였기에 정부가 선제적으로 제도를 바꾸기는 어려웠고, 우리는 각종 회의를 통해 대응 계획을 논의하며 기록을 남겨두는 수준에 그쳤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일수록 행정은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음을 체감했다.
이 경험들을 통해 행정이란 국회·산업계·전문가·언론과의 관계 속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배웠다. 삼권분립 속에서도 정부는 국회 앞에서 ‘을’의 위치에 서야 했고, 산업계와는 늘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국회가 열리는 전 날에는 의원실로부터 질의서를 입수했고, 질의서 입수가 끝나는 새벽시간까지 모든 직원은 사무실에서 대기하는 게 일상이었다.
또한 순환보직 체계 속에서 전문성이 부족한 공무원은 산하기관·전문가 집단의 도움 없이는 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다. 나는 질병관리청과 국가생명윤리정책원의 도움을 수없이 받았고, 전문가 검토가 두세 차례 이상 확보되어야 비로소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전문가 네트워크의 지원은 사무관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자, 동시에 반드시 의존해야 하는 기반이었다.
업무는 보람차고 재미있었지만, 업무량은 끝이 없었다. 퇴근 준비를 할 시간인 6시가 다가오면 서무가 저녁 도시락을 조사했고, 모두 함께 도시락을 먹은 뒤 다시 야근을 이어갔다. 초과근무 수당은 월 57시간 한도였지만 실제 근무시간은 그 두 배에 달했다. 밤을 새다가 휴게실에서 잠시 잠을 청하기도 했다. 이렇게 높은 근무강도 탓인지 직원들 사이에서 질병휴직 사례가 많았고, ‘나도 남일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4개월의 시보 생활이 끝나자 정식 부처 배치의 선택지가 주어졌다. 나의 가치관을 돌아보면 보건복지부나 고용노동부 같은 부처가 잘 맞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과중한 업무로 지쳐 있었고, 이 생활을 10년, 20년 이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결혼과 출산을 앞둔 상황에서 더욱 고민이 깊어졌다. 결국 나는 다른 부처를 선택했다. 그러나 지금도 가끔은 보건복지부에서 보냈던 그 뜨겁고 치열했던 시간이 떠오른다. 짧았지만 깊었던 그 경험은 내 행정 커리어의 중요한 출발점이자 전환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