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적인 공직의 삶을 뒤로하고, 내 가치관을 찾아서
사무관으로 일한 지난 5년 동안, 나는 같은 질문을 수없이 되뇌었다. 과연 이 길이 내 삶과 맞는 걸까. 이 글은 그 고민 끝에 내린 선택과정을 담은 기록이다.
지방연수 후 선호 부처를 1~3지망까지 제출하고, 면접을 거쳐 최종 배치를 받았다. 부처 배치는 2차 시험과 연수 성적, 그리고 면접 결과를 종합해 정해진다. 예전에는 기획재정부 같은 ‘힘 센 부처’가 인기가 많았지만, 요즘은 워라밸이 보장되는 처·청·위원회 등의 인기가 더 높다. 나 역시 워라밸, 전문성, 관심 분야, 조직문화를 고려해 지원했다.
정식 배치받은 부처에서의 구체적인 이야기는 퇴사 후에 더 자세히 풀어보려고 한다.
공무원으로 일하는 보람은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되는 방향을 고민하며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검토한 방안이 실제 정책에 반영되거나, 다양한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비교·조율해 판단할 수 있을 때 성취감을 느꼈다.
중앙부처의 정책 추진 구조도 장점이 있었다. 부처가 큰 방향을 잡고 산하기관이 세부 검토와 집행을 맡는 구조 덕분에, 사무관은 큰 그림을 그리면서도 실무 지원을 받아 전문성의 한계를 일정 부분 보완할 수 있었다.
또한 중앙부처에서 일하며 행정부와 입법부의 관계, 대통령실과 중앙부처의 관계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정책의 의사결정 과정과, 정책이 제도로 구현되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건 값진 경험이었다.
거대한 조직이다 보니 비효율적인 일이 끊이지 않았다. 보고를 위한 보고가 반복됐고, 국회 일정에 따라 철야 대기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도 잦았다. 업무보고나 업무계획, 예산설명 자료처럼 의례적으로 쓰는 문서에도 에너지를 많이 쏟아야 했다. 10개년 중장기계획이나 기본계획 같은 각종 중장기 계획 문서도 불필요한 업무의 대표적인 예였다. 중장기 전략의 필요성 자체에는 공감했지만, 유사한 내용의 계획 문서와 연례 업무계획이 넘쳐나다 보니 실제 지침으로 활용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결국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두꺼운 문서를 만들기 위해 불필요한 에너지를 과도하게 쏟는 셈이었다. 국정감사 시즌에는 끝없는 자료를 준비해야 했고, 질의서가 입수되는 날에는 모든 직원이 새벽까지 사무실에 남았다. 중요도가 낮거나 불필요해 보이는 업무에 시달리느라, 정작 필요한 본연의 업무는 야근으로 처리하거나 검토의 깊이가 얕아질 수밖에 없었다.
순환보직은 또 다른 한계였다. 순환보직은 원래 특정 부서에 오래 머물며 생길 수 있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한 장치였지만, 지금은 그 필요성이 줄었음에도 인사 편의상 유지되고 있다. 1~2년마다 새로운 부서로 옮기다 보니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기 어려웠고, 이제 막 익숙해질 만하면 다시 처음부터 적응해야 했다. 일부 부처에 전문직 공무원 제도가 있긴 했지만, 일반적인 승진 루트와 다르다 보니 실제 지원자가 적어 자리가 비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 어려운 결정이나 골치 아픈 사안은 후임에게 넘겨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구조적으로 이해할 만한 동기였지만, 책임 있는 판단은 더 어려워졌다.
인사 제도의 경직성도 크게 다가왔다. 공채 위주 구조로 외부 전문가가 들어오기 어렵다 보니 조직은 다양성을 잃었고, 정책의 전문성 역시 한계가 있었다. 조직 내부도 폐쇄적이어서 ‘공채 기수 문화’가 여전히 뿌리 깊었고, 분위기 역시 획일적이었다. 결국 공직의 경쟁력과 조직의 활력을 위해서는 개방성이 더 커져야 한다고 느꼈다.
공무원의 안정성은 분명 장점이다. 웬만한 상황에서도 승진과 보수가 보장된다. 하지만 이 안정성이 오히려 조직을 정체시키기도 했다. 소신 있게 목소리를 내는 사람보다, 주어진 일을 무난하게 처리하는 사람이 더 오래 살아남는 분위기였다. 젊은 사무관들이 금세 의욕을 잃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느꼈다.
겉으로는 공무원이 육아와 잘 맞는 직업처럼 보인다. 육아휴직, 모성보호시간, 육아시간 같은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만, 실제로 쓰기는 쉽지 않았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일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 오래 자리에 앉아 있었는지가 성실함의 기준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이 돌봄 공백이 생겨도 눈치가 보여 탄력근무 같은 제도를 쓰기 어려웠다. 아이가 아플 때조차 병원에 데려가기 힘들어하는 동료들을 많이 봤다. 그래서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게 조직 내에서는 부담으로 느껴졌다.
처음 본격적으로 이직을 고민한 건, 나와 맞지 않는 부서장을 만났을 때였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폭발하는 상사 밑에서 일하는 건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 사람도 조직에서 승진하는 걸 보며 회의감을 느꼈다.
결정적인 계기는 육아휴직이었다. 잠시 발을 빼고 내 삶을 돌아보니, 나는 조직에 맞춰 일하기보다는 혼자 주도적으로 움직일 때 더 몰입하고 성취를 느끼는 성향이란 걸 다시 확인했다.
입직 5년차 정도가 되니, “지금이 아니면 더 늦는다”는 압박감도 작용했다. 조직에 남아 승진을 이어가며 공직 경험을 살려 민간으로 이직하는 길도 있었지만, 나는 내 삶을 돌아봤을 때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결국 이직 고민은 단순히 “지금 일이 힘들다”는 차원을 넘어, 내 성향과 가치관에 맞는 삶을 살고 싶다는 더 근본적인 고민으로 이어졌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이직을 진지하게 고민했을 때, 몇 가지 대안 후보군을 비교해보았다.
첫 번째는 변호사였다. 대학 시절 공익법재단에서 인턴을 했던 경험 이후로 줄곧 마음속에 품고 있던 길이었다. 당시 느꼈던 공익 변호사의 보람과 열정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두 번째는 공무원으로 더 머무르면서 국제기구나 교수로 진로를 전환하는 것이었다. 국비유학을 통해 석사 과정을 밟거나, 자비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고용휴직 기회를 활용해 국제기구에 지원하는 길이다. 하지만 국제기구 인턴 경험을 통해, 그곳 역시 거대한 조직과 시스템 속에서 움직이는 구조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결국 공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 성향과는 맞지 않았다. 교수를 도전하기에는 특정 분야에서 연구를 깊이 하고자 하는 동기가 크지 않았다.
세 번째는 의사나 한의사 같은 전문직이었다. 사람들을 돕는 일이 보람 있게 느껴졌기 때문에 성향상 잘 맞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커리어를 완전히 전환하기에는 긴 수련 과정을 다시 거쳐야 한다는 기회비용이 너무 컸다.
고민 끝에 남은 것은 결국 공익 변호사의 길이었다. 오래 전부터 품어왔던 꿈이었고, 여러 대안과 비교해도 여전히 가장 내 마음에 와닿는 선택지였다.
예전에 인턴으로 함께 일했던 변호사님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변호사님은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공익 변호사로의 진로 전환도 괜찮다”며 내 선택을 지지해주었다. 그 말이 큰 용기가 되었다.
반면 회사 선배였던 한 과장님은 강하게 만류했다. 사무관이라는 지위와 안정성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5년 남짓한 공직 경험을 민간에서 살리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공직에서 더 경험을 쌓으면서 천천히 고민해도 늦지 않다는 조언이었다. 두 사람의 상반된 반응은 나를 더 고민하게 했지만, 결국 선택은 내 몫이라는 걸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붙잡았던 고민은 학업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하지만 내가 즐거운 일을 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이들에게도 더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
배우자의 지지도 큰 힘이 되었다. 학자금은 대출을 받고 생활은 빠듯하더라도 괜찮다며 응원해주었다. 나중에 개업을 하게 되면 사무장 역할을 맡아주겠다는 농담 섞인 약속까지 하며 격려해주었다. 배우자의 든든한 뒷받침은 이 결정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육아로 정신없는 나날이지만, 이직 결심을 다지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주문해둔 리트 기출문제를 받아들었을 때, 다시 수험생이 된 듯한 실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공직에 복귀해도 지난 몇 년간 느낀 불만족이 쉽게 해소되지 않을 거라는 건 분명했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안정적인 공직의 길을 내려놓고, 오래 전부터 품어왔던 공익 변호사의 꿈을 향해 나아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