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이것은 죽은 새들에 관한 이야기다.
지금 사는 집을 지으면서 아빠가 요구한 건 옥상에 새장을 짓는 것이었다. 적당히 한두 마리가 놀 수 있는 소소한 새장이 아닌 집 절반 크기의 50마리의 새가 들어갈 수 있는 쇠 파이프로 지은 커다란 새장. 그것은 새장이라기보다는 새 ‘우리’에 가까웠다. 그 새 우리 안에는 작은 인공 호수도 있었고 금붕어도 여러 마리 헤엄쳤다. 그야말로 아빠가 만든 작은 세계랄까. 아빠의 취미는 늘 우리 형편에 과했고 그는 직접 실행하기보단 돈과 인부 그리고 엄마의 노동력을 써서 ‘해내고야 마는’ 공무원 출신이었다. 언제나처럼 엄마는 ‘나이가 많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불쌍한’ 아빠의 말을 따랐고 나는 그것이 항상 못마땅했다.
귀여운 고양이나 강아지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새람?
새장보다 작은 본가 내 방으로 돌아와 사는 삶은 옥상 위 새들 보다 조금도 낫지 않았고 빨래를 널러 갈 때마다 징그럽게 개체 수가 늘어 가는 저 새들과 옥상을 잠식해가는 화분들, 정돈 안 된 잎사귀들에 질식당하는 것 같았다.
이야기가 돌아왔지만 사실 이건 죽은 새들에 관한 이야기인데
작년부터 재개발이 2년이 남았다는 주공 아파트에 작업실을 꾸리게 되었다. 그동안 집에서 일하는 거, 자는 거, 먹는 거 등등 모든 부분에서 부모님과 부딪혔는데 드디어 아주 오랜만에 나만의 공간을 만든 것이다. 대부분은 아주 만족스러웠지만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이면 늘 베란다와 부엌에서 물이 샜다. 타지 생활할 때 별 희한한 곳에서도 살아봤건만 비가 새는 곳에서는 처음 살아본다. 88년도에 지어진, 나보다도 더 오래된 이 아파트의 벽에서 물이 스며들면 쓰레받기로 바닥에 고인 물을 퍼서 쓰레기통에 모으고 그 모은 물을 하수구에 버리는 과정은 비가 멎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고단한 수고가 반복되던 밤, 나는 비로소 영화 <기생충> 속 1층 어딘가에 있을 거라 짐작하던 내 삶이 반지하에 위치했음을 실감했다.
지난가을에는 매주 주말마다 태풍이 왔다.
나는 자다가도 두 시간에 한 번씩 물을 모아서 버려야 했고 더 이상 이럴 수는 없어! 태풍이 오기 전에 집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알겠다고 내일 집을 들러보겠다고 하더니 이내 다시 전화가 와서는 지금 그 아파트 다른 세대도 곳곳에 비가 샌다고 들었다. 어차피 2년이면 허물 집이고 처음에 계약할 때 집 시설을 바꾸지 않기로 한거 아니니? 했다. 아니 아저씨, 그때는 제가 비가 새는 집인지 몰랐잖아요? 어쨌든 그는 내일 들리기로 했으나 여전히 소식이 없다. 곧 없어질 집에서 돌아올 태풍을 기다리며 노심초사하는 것이 불행을 기다리는 내 삶의 모습과 닮아 꽤 서글프다.
부서져버릴 집에 사는 것과 죽어버릴 새들을 위해 새장을 짓는 것
망해버릴 작품을 만드는 것과 망쳐버릴 인생을 사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새들은 모조리 죽어버렸다. 간밤에 천장에서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리길래 여느 때처럼 길고양이들이 정모라도 하는 줄 알았건만 살생과 습격의 현장이었던 모양이다. 아빠가 본인 자식들보다 더 정성 들여 키운 50여 마리의 새들은 색색의 깃털들이 가지런히 놓인 채 이웃집 돌담 틈에서 발견되었다. 서너 마리의 길고양이들은 새 우리 천장의 두꺼운 비닐을 찢고 하나씩 하나씩 물어 죽였을 것이다. 엄마 말론 아침에 가보니 앵무새 한 마리가 겨우 살아남았지만 밤새 생존의 공포에 시달리던 그 친구도 오래 살진 못했다.
나는 한동안 고양이들을 몹시 미워했다. 고 고백한다.
애정 하진 않지만 우리 ‘것’이었던 새들의 죽음과 가여워 혹은 귀여워하던 길고양이들의 역학관계 속에서 나는 조금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니네 밥도 챙겨주고 얼마나 예뻐해 줬는데 이럴 수 있니!? 집을 고쳐주는 ‘아량’을 베풀거나 그냥 모른 척 지나가는 선택을 할 수 있는 내 집주인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내 작품을 망치거나 살릴 기로 위에 있는 감독으로서의 나는 또 어떠한가. 한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무기력에 빠져있을 때의 나는.
영화 <기생충>을 보면서 즐기지 못했던 건 비단 높은 층계에 좌절해서가 아니었다. 그건 반지하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오직 위층 누군가의 선택에 달려있단 점이었다. 생과 사의 문제는 아빠나 고양이에 달려있는 저 새들처럼 말이다. 새 같은 내 삶처럼 말이다.
이따금 이대로 가다간 꼭 망해버릴 것 같은데 이 망할 것 같은 인생이라도 끝까지 지켜내야 하는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묻고 싶을 때가 많다.
다만 이건 그저 죽은 새들의 이야기일 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