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무게

2017 예술공간 이아 그룹전시 작업기

by 오씨네

영화 <지슬>의 선덴스 수상이 제주 전역 신문에 매일 대서특필 되던 때였다. 나는 당시 휴학을 하고 집에 내려가 있었다. 엄마에게 우리도 저 영화 봐보자고 하면서 “엄마 우리집엔 4.3 피해자가 없어서 다행이지?” 라고 했는데 엄마가 “무슨말이니게 외할머니가 4.3 생존자잖아” 라고 말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4.3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할머니는 4.3 당시 온 가족을 잃고 홀로 생존하셨는데 그 “생존자의 불안함” 때문에 엄마가 어린시절 일주일에 두세번씩 집에서 굿을 했다고 했다. 없는 살림에 매일 미신에 빠져 굿을 하는 외할머니가 이해가 안되고 미웠었다고. 그리고 ‘불안’이라는 감정은 전염이 쉬워 할머니 곁에 있음 아무리 가족이고 이해하려 해도 같이 불안해지니까. 점점 멀어지게 된다고도 했다. 나는 처음 가족의 역사를 알고 충격을 받았다.


나에게 4.3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원치 않았던 불안을 몸으로 체득해서 평생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4.3이고, 본인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똑같이 불안이 많은 엄마가 되어 큰딸인 나를 학교성적으로 외모로 계속 채근하며 불안을 넘겨주었던 나의 엄마가 4.3이고, ‘잘해야 한다’ 는 압박감에 수 많은 밤을 새우다 불면이 심해져 수면제를 끊을 수 없던 내가 4.3 이다. 나는 나의 불안을, 나를 이해하고자 4.3을 알게되었다.


몇 년 뒤 해외 근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제주는 변해있었다. 연예인들이 이사를 오고 수 많은 스타트업과 디지털 노마드들이 물밑듯 들어오는 인기있는 관광지가 되어있었다. 소위 말하는 ‘힙’한 곳. 스무살부터 숱하게 듣던 “제주도 사투리 좀 해봐라, 말타고 학교 다니냐?”는 질문을 이제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대로였다. 그저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름 붙이냐에 따라 달리 불려질 뿐이었다. 나는 우리를 잘 알지도 못하는 ‘육지사람’들이 제주의 자원을 팔며 돈을 벌고 자기것인양 하는 것이 셈이났다. 사실 나는 좀 잘 되고 싶었고 제주도 출신도 여기서 잘 할 수 있단걸 보란듯이 보여주고 싶었다. 마침 4.3 70주년이 다가오고 있으니 때맞춰 뭔가를 내보이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4.3 세미나에서 질의응답때 손을 들어 제가 4.3관련 영화를 준비하고 있으니 주변에 관련 당사자가 있음 소개해 달라고 당차게 말했고 그래서 소개 받은 분이 강춘심 할머니였다.


할머니 조카분과 할머니를 식당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는데 할머니는 옛날에 집에 집사와 도우미도 여럿뒀던 아주 큰 부잣집이였다고했다. 할머니의 부모님 역시 일본 유학파의 초엘리트셨고 제주 대대로 유명한 유지셨다고했다. 나는 얘기를 들으며 인터뷰 대상을 잘못 잡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 머릿속엔 ‘전형적인 피해자’ 가 있었고 할머니의 케이스는 그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헤어지며 집에 귤이 있으니 좀 가져가란 말에 할머니가 혼자 사는 작은 빌라에 들렸다. 그 집은 입구부터 빽빽히 물건으로 꽉 채워진 마치 하나의 작은 동굴이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여전히 밭일을 하는 할머니의 쉴 곳은 이 작은 집이구나. 나는 그 순간 이 취재를 계속 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몇 번의 만남과 인터뷰, 촬영 중에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동네에 한번도 안가봤다는 맛있는 중국집도가고 할머니 밭 있는데도 가고 복지관도 다녔다. 할머니랑 손을 잡고 걸으면 무게가 안느껴져 몇 번을 다시 바투 잡았다. 그래도 할머니 집으로 돌아가 각을 잡고 녹화를 하려고 보면 할머니는 자꾸 집나간 둘째 며느리나 복지관에 다른 할머니들 얘기를 했다. 4.3 당시 감정을 여쭤봐도 자꾸 회피하신다는 느낌이 들어 집에갈 땐 ‘아 오늘 촬영도 망했다’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할머니가 갑자기 연락이 안됐었다. 전화도 안 받으시고. 복지관에 연락해야하나. 나는 혹시...하는 불안감과 동시에 아직 촬영 다 안끝났는데...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할머니를 만나서는 괜히 할머니는 나 안보고싶었냐고 투정부렸다. 할머니는 몹시 미안한 얼굴로 ‘보고싶었지…’ 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한번도 하지 않았던 - 4.3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꿈에도 안 나온단 이야기, 아이를 셋이나 잃은 이야기, 그 중 하나는 고등학생때 잃었다며 아직도 그 또래 아이들이 지나가면 ‘그 애도 살았다면 저렇게 팔짝팔짝 뛰어다녔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는 -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 긴 세월동안 정말이지 누구도 할머니와 그 삶의 무게를 나누지않았다. 젊은 나는 어떤 위로를 건내야 할지 몰라 4.3 채록이고 뭐고 내가 할 수 있는건 할머니의 그 가벼운 손을 말없이 잡아주는 것 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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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워 그런지 길에 사람이 없다며 오후 내 서문시장 앞에 콩 팔러 나갔는데 하나도 못 팔았다고했다. 그날은 정말 추운 날이었다. 나는 마침 콩이 필요하던 참이였으니 내게 파시라고했고 한사코 말려도 할머니는 한 되를 더 얹어주시며 농사지은 다른 콩들도 모조리 싸주셨다. 콩으로 가득한 백팩을 매고 할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나는 촬영을 하러 할머니를 만나고 할머니는 나를 만나려 바지런한 일상에 틈을 낸다. 내 마음이 너무 후져서, 내가 너무 별로라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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