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백> 반짝였던 지난날을 후회할 순 없어요

영화 <룩백>을 보고

by 오씨네


지난 8개월 동안 스스로 가장 많이 되뇌었던 생각이 있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그 작품을 선택하지 않고, 그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았으면 아니 아예 괜히 이 일을 한다고 무슨 대단한 자아실현이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기쁘지 않았더라면. 열심히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럼 나는 지금 좀 더 괜찮았을까. 하는 생각들을 멈출 수 없었다. 너무 자기 파괴적인 걸 알면서도 나는 어느 지점에서 고장 나서 앞으로는 도무지 나아갈 수가 없는데 이제 와 원래 세상일이 다 그렇다는 식의 위로 역시 조금도 도움 되지 않았다.



내가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사람을 믿으라'던 사람들은 일이 잘못되었을 때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했다. 분명 어떤 일들이 있었고 상처받은 내가 있는데 마치 언급하지 않으면, 잊어버리면 없던 일이 되는 것 마냥 굴었다. 나라는 고유한 사람은 그냥 나 자체로 여기 있는데, 누군가 이름을 불러줘야만 존재할 수 있는 무력한 입장이란 것도 알았다. 애써 한 단계 올라갔다고 생각했을 때 돌아돌아 결국 '지원누나' 밖에 안된다는 것도. 아프게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이 '지원누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가망 없는 일에 더 이상 매달리기엔 이미 너무 많은 시간과 마음과 체력을 써버린 것도.





후지노가 쿄모토에게 "내 뒤에만 있으면 너도 나아질 텐데!"라고 말하던 장면에서 내가 지난 3년간 들어왔던 여러 말들이 스쳐서 괴로웠다. 나는 다른 선택지를 고르는 게 무서워서 남았지만 쿄모토는 미대에 진학했다. 후지노가 쿄모토에게 나를 떠나서 너는 실패할 거고 제대로 하지 못할 거라며 악다구니를 퍼붓는 모습에서 그녀야말로 그녀를 엄청 의지하고 있고, 사실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너랑 같이 작업하고 싶어. 니가 필요해. 나를 도와줘'라는 뜻인 걸 애니메이션 대사에서 느끼곤 약간 멍했달까.



나한테 그렇게 말해줬으면 좋았을걸. 니가 필요하다고. 같이 하고 싶다고.

너 여기서 나가면 아무것도 얻는 것도 없고 앞으로 우리 관계도 끝이라고 하는 말 대신.

그러면 그나마 적어도 이 작업에 내가 필요하다는 마음에 돕는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기꺼이 했을 것 같다.

잘 되게는 못해도 망하게는 할 수 있다던 말은 너무 위협적이어서 지난 시간을 떠올렸을 때 어떤 프로덕션의 순간들도 보잘것없이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이내 극장에서 나는 이 모든 일들이 어쩔 수 없었구나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리될 일은 그리되기 마련이다.'

라는 문장을 요즘 아침마다 생각하는데 이 커다란 운명의 수레바퀴 위에 나란 인간은 너무 작디작은 것.

후지노가 쿄모토를 방에서 꺼내지 않고 각자의 길을 걸어갔어도 그래서 우연한 도움으로 쿄모토가 죽지 않게 됐을지라도 그 우주에서 후지노와 쿄모토는 역시나 만화를 좋아할 것이고 그리고 있을 것이고 아주 오랜 시간 서로를 모르고 살았어도 어릴 적 동경하던 선배 후지노의 등을 보며 따라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우주의 나 역시도 영화를 좋아하고 결국 하게 됐을 것이다.

멀리서 봤을 적에 동경했던 당신들을 따르고자 했을 것이다. 너무 닮고 싶었고, 잘 보이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것이다.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건 아니고. 그치만 그 모든 순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때의 나는 당시에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선택했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인 채로 보내줘야 하고 이미 오래전에 과거가 된 것도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둘이서 즐겁게 만화를 그리고 우정을 쌓고 또다시 만화를 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동력이 되어 창작을 하고 같이 즐거워서 더 잘하게 되는 그 모든 순간을 모아둔 시퀀스를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오는 내내 되뇌었다.

팀으로 하는 작업이 주는 활기와 고단함의 에너지를 자꾸 떠올려보았다.

무슨 대단한 것을 만들어보겠다고 얼굴 붉히며 아웅다웅하고 그래서 결국 좋은 장면이 나왔을 때 마음 가득 벅차올랐던 순간들을. 반짝였던 그 순간들, 그 짧은 스침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나는 이제 그만 뒤돌아보려고.


그런 순간들이 당시 내게 필요했고 알맞게 찾아왔었다. 그거면 된 것 같기도 하다.





영화 <룩백> 2024년 9월 14일 신촌 메가박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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