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통을 더 잘 견디는 사람

의사 선생. 말 좀 가려 합시다(2023.01)

by 강나루

명절이나 대체공휴일같이 쉬는 날이 길게 붙어 있을 때에는 뜻하지 않은 사고나 실수로 다치게 되는 경우에 참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병원들도 휴진하는 곳이 많아 응급실을 이용할 수밖에 없어 가능하면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기 위해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죠.

날씨까지 오락 가락 하고 추위가 기승을 부려 안 그래도 컨디션 난조였던 저는 나름대로 조심을 한다고 노력했지만 생각지도 않은 일이 생겼습니다.


설 당일 날 밤에 방 안에서 움직이다가 침대 모서리에 새끼발가락을 아주 세게 부딪혔어요.

어찌나 세게 부딪혔는지 꽈 직 하는 큰 소리가 났고 조용한 새벽시간에 큰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이를 꽉 악물어야 했습니다.

밖에 있던 딸의 엄마 괜찮아?라고 묻는 소리에 바로 대답을 못할 만큼 아파하고 있는데 아이가 놀라서 뛰쳐 들어왔어요. 하...


부딪힌 발가락은 CRPS가 있는 왼쪽 다리여서 통증은 금세 다리를 타고 올라 다리 전체와 허리까지 돌발통으로 번졌고 뼈에 금이 갔을 거라 짐작했습니다. 예전에도 한 번 침대에 부딪혀 발가락 뼈에 금이 간 적이 있어 점점 심해지는 통증에 짐작은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고요.

응급실을 갈 것인지, 다음 날 진료를 보는 병원을 찾아갈 것인지 얘기를 나누다 응급실로 가면 밤이 새도록 추운 바깥에서 대기를 해야 하고(4~5시간) 안으로 들어가도 정형외과 전문의를 만나려면 어차피 다음 날 오전 8시가 되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경험상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 같이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우선 식구들을 재웠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집에서 가까운 곳에 진료를 하는 정형외과를 찾았습니다.

마약 진통제를 먹고 통증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며 수면제를 먹고 잠들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날 밤 진정되지 않는 통증에 밤새 소리 없이 뒤척거리며 날이 밝아 오기만 기다렸습니다. 제가 그날 밤 뼈에 금이 간 고통과 수시로 다시 생기는 끔찍한 돌발통을 참을 수 있었던 건 명절을 맞았다고 처음으로 명절음식(갈비찜, 탕국-제사 안 지냅니다. 그냥 먹고 싶어서요^^, 여러 종류의 전, 밑반찬, 김치찌개, 차돌 된장찌개, 떡국)을 준비하느라 애쓴 딸을 조금 이나마 쉬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집 근처에 있던 정형외과는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제법 규모가 큰 병원이었습니다.

9층까지 있는 큰 건물을 모두 병원이 사용하고 있었고 입원실을 갖추고 있는 데다 투석실과 엑스레이, CT, MRI를 모두 갖추고 있는 중소형급의 병원이었어요.

진료하시는 원장님도 진료경력이 좀 있고 요즘 종편채널에 패널로 출연하고 있다고 배너 광고를 몇 개나 세워 놓고 광고를 하고 있더군요.


이제부터 진료실에서 있었던 대화 그대로 적어 보겠습니다.

의사: 아... 발가락을 다치셨어요? 여기에 발 올려놓으세요.(작은 의자가 있었습니다. 발가락을 세게 잡고 앞뒤로 움직이며) 아파요?

나루:아!!! 하하핫 아파요!(전 너무 많이 아프면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거나 그마저도 안되면 웃음이 나와 버려요.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어도 통증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달은 후부터요. 오히려 소리를 지르면 신경까지 날카로워져 더 힘들어지거든요.)

의사:(다시 발가락을 세게 잡고 앞뒤로 움직이며) 아프다고요?

나루:아니! 그러지 마세요. 많이 아프다니까요!! 아프다고 말했잖아요???

의사:아픈걸 왜 웃으면서 말해요? 아... 뭐... CRPS가 있다고요? 무슨 약 먹어요?

나루:마약 진통제 먹어요. 그리고 사람마다...

의사: 아니 마약 진통제 그걸 왜 먹어요? 중독되는데? 그런 것도 모릅니까?

나루:제가 중독인지 아닌지 아시나요? CRPS 돌발통이 심하기 때문에 먹습니다. CRPS환자는 다 마약 중독자인가요? 그리고 사람마다 아플 때 표현 방법은 다를 수 있고요. 쓸데없는 얘기 마시고 금이 갔는지 아닌지만 확인해 주세요.

의사:아~~ 네~~ 그럼 진통제는 필요 없으실 테고 지금 봐선 잘 안 보이네요. 금이 안 간 걸 수도 있고요. 계속 아프면 2~3일 후에 와서 CT 찍으세요.

나루:지니야. 나가자.


그렇게 진료실을 돌아 나오고선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큰 소리를 내며 싸우지 않은 이유는 기다리는 환자가 많았기 때문 이기도 했거니와 제가 입을 열어 다툼으로 제 자신 스스로를 천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어라고 말한 들 그 의사의 태도나 생각이 바뀌진 않을 테니까요.

오히려 저를 마약 진통제를 남용하는 정신병자라고 생각했겠죠.


제가 아무리 아파해도 발가락에 금이 간 정도는 당일에 안 보일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압니다.

2~3일 후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으면 오히려 금이 간 자리가 진해져 확실한 후속 조치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이 가거나 부러진 통증보다 훨씬 더 큰 통증에 매여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 통증 좀 참는다고 죽지 않는다는 것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히 병원에 갔던 이유는 발가락으로 인해 계속해서 돌발통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1년이나 미뤄진 Wash out 탓에 온몸에 독한 약이 쌓일 대로 쌓여 마약 진통제를 조금이라도 많이 먹으면 심한 알레르기가 생기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생겨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연휴가 지나고 다른 정형외과를 찾아 실금이 가고 인대가 파열됐다는 진단을 받고 제대로 된 조치를 취했습니다. 연휴 내내 참느라고 애쓰셨다는 위로까지 덤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가진 병은 그저 병일뿐입니다.

제 병이 저의 정체성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제가 가진 병이 저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몰지각한 부류가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 것과 인성이 훌륭한 것은 완전 다른 이야기입니다. 머리가 좋아 의사가 된 부류들이 자신들이 의술을 베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의술 우리가 돈 주고 사는 것입니다.

의사들, 자신들이 신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 입, 좀 조심하라.
그 천박한 입이야말로 당신이 얼마나 저열한 인간인지를 스스로 증명하고 있으니까.



keyword
이전 11화발레 하듯 걷잖아. 어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