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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용 Oct 06. 2019

마찰(력) friction

마찰은 상황에 따라 혹은 이용하기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물리적 힘의 용어이지만 사회적 문제의 용어로 더 자주 사용된다


이중적이며 상반된 가치를 가진 두 얼굴의 힘   


갈등의 원인이자 에너지의 근원  


소비자 마음 속에도 존재하는 마찰  



추울 때 손이 시리면 손을 비벼서 따뜻하게 만든다. 손과 손의 접촉면에서 마찰을 통해 열을 발생 시키는 것이다. 마찰의 가장 단순한 사례이다. 마찰은 꽤 재미있는 힘이다. 또한 매우 어려운 분야이다. 그리고 마찰은 중용(中庸)의 개념이 적용되어야 하는 힘이다. 마찰은 물리적 힘의 한 종류이지만 사회적 갈등 현상을 표현하는데 많이 등장하는 단어이다. ‘부정적 기능’과 ‘긍정적 기능’ 혹은 ‘불필요한 현상’과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힘’ 등 상반된 두 가지 개념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러나 ‘마찰’이라고 하면 대체로 부정적 느낌을 갖는다. 물리학 분야에서는 운동을 방해하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주범으로 꼽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반드시 필요한 힘으로써 긍정적인 면이 더 많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굳이 학문적 이론이 아니더라도 가까운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만 보더라도 마찰이 없으면 걸어 다닐 수 없다. 발과 땅 사이에 마찰의 작용이 없으면 발이 미끄러져서 걸을 수 없다. 미끄러운 얼음 위를 걷더라도 내 몸무게를 감당할 만큼 마찰이 존재하여야 원하는 방향으로 이동이 가능하다. 즉 마찰은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발생하면 좋지 않지만 반면에 필요한 만큼 존재하지 않으면 곤란한 것이 마찰이다.

물리학에서는 마찰이란 두 물체의 접촉면에서 상호 운동을 방해하는 현상 혹은 힘이라고 정의한다. 마찰과 구분하여 마찰력을 마찰을 일으키는 힘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마찰 그 자체가 힘의 한 유형이기 때문에 마찰을 마찰력이라고 표현 할 필요는 없으며 단지 마찰을 일으키는 힘의 크기를 물리학적으로 계산할 때 마찰력이라는 표현이 필요하다고 본다. 힘이란 ‘물체의 모양 혹은 운동 상태를 변화시키는 원인’이라고 하는 정의에 미루어 볼 때에도 ‘마찰’이라고 할 때 이미 힘의 의미가 포함되는 것이다. 즉 ‘마찰이 발생한다’ 혹은 ‘마찰이 존재한다’라고 할 때 거기에는 이미 힘이 존재하거나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마찰’이란 그 자체가 ‘힘’이다. 따라서 마찰이란 원인이자 동시에 현상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마찰은 방해하는 작용으로 인해 힘의 손실을 전제로 하는 힘이다. 따라서 마찰은 저항의 힘이며 손실의 힘이다. 그럼에도 또한 그 저항과 손실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원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마찰의 가치는 정지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정지란 가만히 있는 것이데 사람이 정지하지 않고 살수는 없는 것이다. 즉 마찰 없는 세계는 상상할 수 없다.
영어에서 마찰은 대부분 ‘fric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friction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대부분 ‘접촉면에서 운동에 저항하는 힘’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공학 분야에서는 tribology(트라이볼러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일상적 표현과 구별하여 마찰과 관련된 산업 분야 즉 기계, 자동차 등의 산업과 공학에서 도입한 용어인데 처음에는 마찰의 상대적 개념인 윤활을 연구하는 학문인 ‘윤활학’으로 시작된 것이다. 즉 마찰로 인해 발생하는 제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윤활, 마모, 내구성 등을 연구하고 관련 기술을 발전시키는 학문 분야이다.

물리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마찰의 부정적인 부분은 대체로 잘 알기 때문에 마찰의 긍정적인 부분만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하였지만 우선 일상생활에서 마찰은 길을 다니는데 필수적이다. 땅 위의 길 뿐 아니라 하늘의 길에서도 마찰이 없으면 비행기도 날기 어렵다. 자동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추진력 보다 제동력이다. 자동차를 원하는 대로 정지시킬 수 있다는 전제가 없이 출발하면 안 된다. 사람이 사용하는 모든 움직이는 물체는 동작 이전에 원하는 시간과 방법으로 정지 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한다.
마찰은 상황에 따라 적절한 마찰력이 필요하다. 자동차가 달리 때에 자동차 몸체에는 가급적 마찰이 적어야 좋겠지만 타이어는 도로 사이에 적당한 마찰이 없으면 달리기도 어렵거니와 미끄러질 위험도 있다. 달리는 육상 선수 역시 같은 입장이다. 스케이트 경기의 경우에는 매우 까다롭다. 최고치의 마찰과 최고치의 윤활 상태가 교대되는 동작이 매우 빠르게 반복되어야 하기 때문에 마찰에 관한 고도의 스포츠 과학이 필요한 분야이다. 즉 움직이는 중에 필요한 마찰, 시작과 정지에 필요한 마찰, 그리고 강력한 마찰과 부드러운 마찰 등 상황에 맞도록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아야 하는 것이 마찰의 힘이다. 따라서 마찰에는 중용의 덕이 필요하다.

마찰과 길
길은 물리적 소통의 수단이다. 언어가 의사 소통의 수단이라면 길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물건과 물건이 교환되는 통로이다. 즉 실물경제와 문화가 형성되고 정치와 전쟁이 실행되는 장소로서 길은 이제 사회 그 자체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소통과 교류의 장에서 마찰은 필연적으로 발생되기 마련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마찰의 정의 즉 ‘접촉면에서 상호 운동을 방해하는 힘’이 이미 항상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사회 속의 현장에서도 마찰은 이미 항상 존재하고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길은 한자(漢字)로 도로(道路혹은 도()라고 한다. 길의 의미는 점차 확대되어 왔다. “무슨 좋은 길이 없을까?”라고 할 때 길은 ‘방법’이라는 의미이다. 좋은 방법이란 일의 규범이 된다. 일의 규범은 행위의 규범이며, 올바른 규범을 안다는 것을 지혜라고 한다. 따라서 도()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길과 지혜. 지혜로서 도()의 의미는 서양의 philosophy(지혜)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된다. 사회 생활을 한다는 것은 길을 가는 것과 같으며, 길을 간다는 것은 길을 찾는 것의 연속이며 그것은 지혜를 찾아가는 길이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도()에 대해서 말하였듯이 비슷한 시기에 서양의 파르메니데스도 길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노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가야 할 길을 반성적으로 말하였는데 특히    사람들의 발자취에서 멀리 떨어진 길그러나 마땅히 가야 할 올바른 길’, ‘탐구의 유일한 길’, ‘설득의 길’ 등에 대해 말하였다. 푸르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처럼 길은 항상 선택의 갈등과 아쉬움을 불러온다. 또한 어느 길이나 순탄치 않다.
이러한 길에서 마찰은 지혜를 찾아주는 역할을 한다. 물리적 마찰이 없으면 길을 갈 수 없듯이 마찰 없는 사회 생활은 애초에 없다. 마찰을 극복하고 활용하여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이미 물리학의 마찰에서 과유불급과 중용의 중요성을 배운 것처럼 사회에서의 마찰과 윤활을 적절하게 다룰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마찰과 불
길 보다 더 중요한 인류 문명의 시작은 불의 사용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주었다고 하지만 인간이 불을 만드는 최초의 방법은 마찰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불은 자연에 항상 존재하지만 막상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불을 사용하려면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도 무인도에서 생존법을 다루는 방송프로그램에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불을 만드는 것이다. 불이 있어야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음식의 조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별한 도구 없이 불을 만들 때 부싯돌을 치는 마찰 방법이 쉽지만 그나마 부싯돌이 없으면 단단한 나무 끝으로 다른 나무를 강하게 비비는 마찰 방법을 사용한다. 그 원리가 발전하여 성냥이 되고 최근에 애연가들의 필수품인 라이터까지 발전 하였다. 불을 쉽게 만들 수 있으며 항상 휴대가 가능한 성냥의 발명은 당시로서는 요즈음 전화기를 휴대하는 것만큼 획기적이었을 것이다. 기술이 발전한 지금도 자동차 엔진 등 불을 활용하는 최신 장비들 내부에는 마찰을 이용한 다양한 기술들이 들어있다.  

이 외에도 마찰은 다양한 도구에 사용된다. 마찰이 없다면 펜으로 글씨를 쓸 수 없으며, 바이올린, 첼로와 같은 악기는 활과 현(줄) 사이에 마찰이 없으면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다. 톱은 나무를 벨 수 없을 것이며 컴퓨터 마우스나 키보드의 작동도 불가능할 것이다.

마찰과 사회
마찬가지로 저항이라는 마찰이 없는 사회는 힘의 관성 즉 권력의 일방향적 진행을 멈추게 할 수 없다. 독재 사회를 만든다. 마찰이 과도하면 사회의 발전적 진행이 어렵다. 기업과 소비자 사이에서도 마찰은 필수적이다. 기업 내부에서 경영진과 노동자 사이에서도 마찰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사회적 마찰의 대부분은 부정적인 현상으로 인식된다. 사회적 마찰을 긍정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마찰의 존재를 당연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마찰의 완화 즉 적절한 윤활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작동 시켜야 한다. 정부 기관 기업 등 조직과 단체에서 사회 전반에 마찰과 윤활을 연구하여 마찰의 완화와 마찰을 활용한 사회적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사회적 트라이볼러지(tribology)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다양한 협상기구가 있으나 사회적 마찰과 윤활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아직 미흡해 보인다.

마찰의 개념을 사회적 현상에 적용한 대표적인 인물은 클라우제비츠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On War)』에서 마찰을 전쟁의 본질이라고 하였다. 『전쟁론』 1편 7장의 소제목이 ‘전쟁에서의 마찰’이라고 하여 전쟁의 현실적 어려움을 마찰의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이 1편 7장뿐 아니라 『전쟁론』 전반에 걸쳐 전쟁에서 마찰의 문제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는 전쟁의 어려움 중에 하나가 마찰의 발생인데 이것이 전쟁 능력을 저하시키는 요인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마찰의 원인으로는 ‘불확실성’과 ‘이론과 현실의 차이’를 중요한 원인으로 꼽았다. 특히 불확실성을 안개로 표현하였는데 정보의 불확실성, 내 외부의 상황 변화의 불확실성, 예측 불가능성을 전쟁에서 가장 큰 장애요소로 보았다.
마찰에 대한 그의 언급을 몇 가지 직접 인용하겠다.

마찰의 개념에 대해서
전쟁에서 … 어려움이 쌓이고 쌓이면 마찰이 생긴다이 마찰은 전쟁을 몸소 경험 하고 있지 않은 사람에는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마찰은 실제의 전쟁과 계획상의 전쟁을 일반적으로 구별하는 유일한 개념이다.”
많은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고이들 각자는 모든 방향에서 저마다 특수한 마찰을 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마찰이라고 하는 것은겉으로 보기엔 쉽다고 여겨지는 일을 현실에서 곤란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불확실성에 대해서
이 와 같은 가공할 마찰은기계의 마찰과는 달리 몇몇 장소에 한정 되는 것이 아니다전쟁에서 마찰은 곳곳에서 우연과 접촉하여 미리 추측할 수 없는 현상을 낳게 한다이들 대부분의 현상은 우연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여기에서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예를 들면 날씨이다안개가 짙게 끼어 있으면 적을 빨리 발견할 수가 없다.”  

이론과 현실의 차이에 대해서
전쟁 이론가의 의견은 수영 교사가 수중에서 꼭 필요한 운동을 육상에서 해 보이는 것 과 같은 것이다이러한 운동은 물의 성질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과장되고 기괴한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또 몸소 전쟁을 경험한 일이 없는 이론가 또는 경험을 했어도 그 경험으로부터 무엇인가 보편적인 것을 이끌어 낼 수 없는 이론가의 이론은 실제에 맞지 않고 무미 건조하기까지 하다.”

마찰의 완화 즉 윤활에 대하여
이러한 마찰을 완화하는말하자면 윤활유 같은 것을 없을까단 한 가지가 있다그러나 그것은 장수나 군대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즉 군이 전쟁에 익숙해지는 것이다이러한 익숙함이야말로 심한 육체적 고통에도 신체를 잘 견디게 하고 큰 위험에 직면해도 마음의 침착을 유지하게 하고 또 전투 초기의 강렬한 충격에도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군인은 육체적 고통에서도 훈련이 되어야 한다그러나 그것은 신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성이 육체적 고통에 익숙해지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클라우제비츠의 마찰 개념은 이후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전쟁과 전략을 연구하는데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전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일상 생활에서 마찰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사회적 마찰은 대부분 실재하는 이해관계의 대립으로부터 발생한다. 물리적 마찰의 관점에서 볼 때 이해관계는 이동하려고 하는 물체에 해당된다. 물체가 정지해 있거나 접촉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마찰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움직임이 시작될 때 가장 큰 마찰력이 요구 된다. 일단 움직임 시작되면 마찰력은 감소한다. 물리학에서는 이를 ‘정지 마찰력’과 ‘운동 마찰력’으로 구분한다. 정지 마찰력은 물체의 움직임의 시작을 방해하는 것이며 운동 마찰력은 물체가 움직이고 있을 때 방해하는 것을 말한다. 

이해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정부가 새로운 정책을 도입하려고 할 때 이해관계자의 대립이 발생하고 새로운 정책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게 될 집단의 저항이 가장 세게 나타난다. 일단 실행되기 시작하면 저항이 약화 된다. 물론 저항은 지속된다. 저항력이 약한 정책은 오래 지속된다. 지속적으로 저항이 강한 정책은 어떤 형태로든 변한다. 
이해관계를 물리적 마찰의 관점에서 움직이려는 물체로 비유 할 경우 실제 마찰이 발생하는 물체의 접촉면은 이해관계가 부딪치는 현실과 그것을 조정하려는 과정 즉 커뮤니케이션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해관계는 접촉면을 누르는 무게에 해당되며 커뮤니케이션은 접촉면 마찰의 원인인 거칠기 혹은 끈적임을 해소하는 윤활제에 해당된다.  

사회적 마찰, 즉 이해관계를 완화시킬 수 있는 대표적인 윤활 방법은 협상이다. 협상은 내용과 형식으로 구별할 수 있다. 내용은 이해 득실을 조정하는 것이며 형식은 커뮤니케이션이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은 협상이라는 마찰을 완화시키는 윤활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  
윤활을 원활하게 하는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논어의 예()에서 찾은 수 있다. 즉 첨예한 이해 관계 속에서도 접촉면에 해당되는 의사 소통에 있어서 표현만큼은 상대를 배려하는 표현과 유연한 태도는 마찰을 한층 부드럽게 해준다.  
 
실재하는 이해관계의 대립은 오히려 윤활이 쉬운 편이다. 물론 간단치는 않지만 쌍방의 이해 득실을 조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찰의 원인이 이해관계가 실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더욱 어렵다. 보이지 않는 적, 혹은 손에 잡히지 않는 적과 싸우는 격이기 때문에 매우 어렵다. 구체적인 이해관계가 아니라 어떤 상징적 이미지에 대한 과도한 선호, 또는 특정 집단의 집단적 정체성 등으로 인한 마찰은 협상으로 풀기 어렵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의 지역 정서에 의한 지역간 마찰은 협상이 불가능하다. 종교나 국가간의 상징적 이미지로 인한 마찰 역시 조정이 매우 어렵다. 우상인가, 성상인가? 로 인한 유럽의 종교적 이미지 파괴와 옹호의 대립 역사는 매우 유명한 이미지에 대한 마찰의 사례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은 우리나라 무궁화를 없애려고 했다. 벚꽃을 즐기면서도 일본을 연상한다고 해서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꽃은 죄가 없다. 단지 그 상징 이미지에 대한 편파적 인식이 문제일 뿐 이다. 이러한 인식으로 인한 마찰에는 윤활제가 딱히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이러한 거품 마찰만 제거해도 사회는 훨씬 건강해질 것이다. 제거를 할 수 없더라도 부드럽게 느슨한 정체성, 파시즘 같은 강한 결속력의 정체성이 아니라 유연한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정리하자면 마찰은 운동에 저항하는 힘이며 두 물체의 접촉면에서 발생한다. 마찰은 에너지를 발생한다. 사회적으로도 적절한 마찰은 사회의 에너지를 만들고 개인을 지탱해준다. 마찰은 미끄러지지 않게 고정하고 지탱하는 힘을 제공한다. 개인과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적절한 마찰은 자기를 지탱하는 힘을 만들어준다. 마찰은 마모를 발생한다. 마모는 분명히 손실이지만 마모되면 매끄러워지고 세련되어 진다. 보석은 마모를 해야 가치가 생기는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마찰은 이중적이며 상반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에게는 가치 있는 힘이 된다. 마찰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완화 혹은 활용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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