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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에 다다르며

쉰여섯 번째 월요일 밤

by 오소영

어릴 때부터 잘 자빠지고 잘 부딪쳐서 항상 몸에 멍이 있었다. 나는 그냥 내가 느리고 덜렁거리는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다가 다치는 일이 반복될 때도, 백팩의 멜빵이 화장실 문고리에 걸려 멈칫할 때도 그랬다.


오늘은 문턱을 넘다가 오른쪽 발가락 두 개를 찧었고(지금도 아프다), 키위를 먹다가 사래가 들렸다. 엄청 새콤한 키위였는데, 한 5분 정도 기침을 해도 신맛 때문에 목이 칼칼했다. 왜 나는 자꾸 어설픈 실수를 하는 걸까? 이유를 댈 수는 있다. 이곳은 아직 내게 익숙하지 않은 친구네 집이고, 사래가 잘 드는 건 위염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내가 조금만 조심했다면 이런 일들은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얼마 전 받은 심리상담에서 나는 나쁜 일이 생기면 바로 자책하고 자학하는 습관이 있다고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그 실수가 그 사람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실수를 하면 내 존재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어릴 적부터 그랬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것, 어릴 적부터 계속 많이 아팠던 것, 왕따를 당했던 것 역시 내 운명이고 내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살다 보면 어떤 일이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고 그건 내가 잘못해서가 아닌 경우가 많다. 물론 내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생각은 정말 잘못된 것이었다.

정신과에 꽤 오래 다니며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 이제는 죽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고, 큰 실수를 해도 예전보다는 빨리 잊을 수 있게 되었다. 치료의 덕분이기도 하고, 노화 덕분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면 나아질 것이라는 말은 이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던 것일까. 어쨌든 우울증은 많이 나아졌지만 하고 있는 작업을 끝내지 못하고, 중요한 일일수록 미루는 습관이 들어버려 그걸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여쭤보니 간단한 ADHD 테스트를 해보자고 하셨고, 결과는 ADHD라고 확신할 만한 수치는 아니지만 꽤 근접해 있다고 나와서 약 한 알을 함께 먹게 되었다.


아토목세틴을 먹으면서 크게 달라진 점은 느껴지지 않는다. 얼마 전부터 루티너리 앱과 뽀모도로 타이머를 함께 쓰면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작업에 몰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어쩌면 앱과 타이머를 쓸 수 있게 된 게 아토목세틴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루티너리를 접했을 땐 깔았다가 바로 지웠었고, 뽀모도로 타이머는 ‘저런 것까지 해서 일의 효율을 바짝 올려 살아야 하나’ 하는 회의감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시간을 채워 집중해서 일하는 것이 즐겁고, 효율을 올려 작업 시간을 줄이고 남은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는 게 좋다.


예전보다는 정신과의 문턱이 낮아졌고, 그에 따라 자신의 문제를 잘 발견하게 된 것은 아주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정신과 약은 먹으면 안 된다’, ‘모든 것은 의지의 문제이니 나가서 햇빛을 쬐고 운동을 하라’는 둥 얼토당토않은 잘못된 지식을 가진 사람이 많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그냥 끌어안고 내 탓이라 생각하고 사는 사람과 그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애쓰는 사람 중 누가 건강할까? 나는 후자라고 본다.


몸의 멍도 마음의 멍도 내가 무르기 때문에, 그게 잘못이라 일어난 일이 아니다. 모든 게 내 잘못이라는 생각은 잘못되었다. 우리는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성공도 실패도 우주의 작은 먼지일 뿐인 우리에게는 그렇게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내게 더 이로운 생각을 잡아두는 데 어떤 약이 유용하다면 그걸 써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물론 선택은 각자의 자유지만, 안타까운 일들이 더 늘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지금의 힘듦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나쁜 생각에 지지 말고 방법을 찾아 극복해나가다 보면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차분히 멀리서 관망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사실 멍 따위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의 때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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