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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Jul 24. 2017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XXXII

'물놀이'


 제노는 목욕을 좋아한다. 비를 맞는 것 역시 딱히 꺼리지 않는다. 물도 많이 마시는 걸로 보아 녀석은 분명 물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녀석이 헤엄을 치는 모습은 어쩐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영화 등에서 간혹 허스키나 털북숭이견들이 멋지게 얼음물속을 헤엄치는 장면이 등장하곤 한다. 개들에게 있어 헤엄은 일종의 본능이라고들 하지만 제노를 생각해보니 어쩐지 미심쩍다. 우리 집 육중한 겁쟁이 털북숭이 아들내미가 물속에서 살아남을 만한 생존력을 가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쉬이 들지 않는다. 


네가.. 물 위에.. 뜬다고...?


 제노 엄마와 항상 우스갯소리로 나누는 이야기지만 우리 제노는 참 늦된 녀석이다. 다른 개들에 비해서도, 다른 허스키에 비해서도, 혹은 굳이 무언가와 비교하지 않아도 견주로서 바라보았을 때 모든 방면에서 늦된 녀석이다. 제노의 절친한 친구 허스키인 니클라스는 정말로 영특하다. "앉아"나 "손"이라는 명령어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깨우쳤고 다른 개들에게 호기심을 보이지만 거리를 유지하며 신중하게 다가가는 것으로 보아 허스키 치고 특히 두뇌가 비상한 편이라는 게 눈에 확 보일 정도이다. 


 제노? 제노는 "손"이라는 말을 알아듣고 동작하기까지 6개월이 넘게 걸렸다.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제노 엄마가 붙들고 앉아 가르쳐보려 했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해(표정도 갸우뚱하는 동작도 그가 전혀, 정말 단 0.0001%도 우리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었다) 진심으로 제노는 '손'을 할 수 없는 녀석이니 포기하자고 마음속으로 내려놓았었다. 다른 개들과 만났을 때도 전혀 조심성이나 경계심 없이 다가갔다가 된통 당하고 도망쳐오기 일쑤. 성격 좋고 순진하다고 받아들여주는 분들이 많지만 견주로서 '조금만 더 머리를 굴릴 줄 알았더라면 네가 덜 힘들 텐데 말이다...'하고 안타까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제노 엄마는 가끔 나와 제노가 참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제노 엄마와 제노가 참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런 말을 서로에게 들을 때면 우리는 늘 발끈하지만 사실 제노, 제노 엄마, 제노 아빠, 그리고 햇살이까지 우리 가족은 모두 비슷한 면모의 성격을 공유하고 있다. 좋아하는 것을 날아갈 듯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며 잠시 머리를 굴려보다가도 어느 순간 생각을 멈추고 일단 뛰어드는, 우리는 그런 가족이다.  


작은 강아지를 바라보는 동네 덩치들(얼마나 부담스러울까) - 좌측부터 니클라스(허스키) / 텐징(말라뮤트) / 제노(허스키) ; 텐징은 얼마 전 영국으로 떠났다 ㅠㅠ 




 5월의 소풍 시즌을 보내고 어느덧 6월, 본격적인 여름을 맞이하고 보니 제노와 딱히 할 수 있는 야외활동이 없었다. 너무 더워서 제노도 나도, 가끔씩 함께 외출하는 제노 엄마와 햇살이도 금방 지쳐버리거나 멀리 나갈 엄두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제노의 허스키 친구인 니클라스의 견주분들로부터 미군부대에서 열리는 반려견 엑스포(Dog Expo) 행사에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전에도 기지 내 반려견 놀이터(펜스가 설치되어 맘껏 풀어놓고 뛰놀게 할 수 있는)에 몇 차례 놀러 간 적은 있지만 본격적으로 반려견을 대상으로 개최하는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쇼독 콘테스트라든가 반려견 용품 판매라든가 여러 행사에 걸맞은 이벤트들이 있었지만 우리가 가장 기대한 것은 바로 반려견 전용 수영장이었다. 


 제노는 수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조금만 교외로 나가면 반려견 유원지나 공원 등에 수영장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최근 도심에도 반려견 전용 수영장을 갖춘 시설이 오픈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만간 햇살이와 제노와 함께!) 햇살이가 태어난 뒤로 자동차에 제노가 편안하게 오래 타고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없어졌다. 제노를 차에 태우고 30분이 넘는 거리를 이동하려면 녀석이 조수석이 아닌 엎드리거나 누울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필요로 한다(무조건 다음 차는 SUV를 목표로..). 평소 제노와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려면 녀석은 조수석에 몸을 일으킨 채로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자세로 탑승을 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20분 이상 차를 타게 되면 자세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탓인지 늘 낑낑대거나 차에서 내려 조금씩 절뚝거리곤 했다.  제노는 목욕을 제외하고 물속에 뛰어들어 맘껏 노는 물놀이라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초여름이지만 아주 더웠던 6월 초 어느 주말, 우리는 단체로 반려견 엑스포를 향했다. 가는 길 내내 니클라스와 제노는 서로의 뺨을 때리고 놀면서 뒤엉키느라 정신이 없었고 햇살이는 '우리 어디가?'하는 표정으로 유모차에서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이른 아침에 찾아간 탓에 아직 개들이 많지는 않았다. 산책을 하며 만나던 반가운 얼굴들과 많이 마주쳤다


행사를 위해 임시로 개설된 작은 풀장과 뒷편의 크고 깊은 풀장 - 깊은 풀장은 'Swim & Survive'라고 적혀 있어서 헤엄을 칠 줄 아는 녀석들을 들여보내는 곳이었다


 물을 너무나 좋아하는 니클라스는 수영장을 보자마자 쏜살같이 계단을 통해 물로 뛰어들었다. 견주분께서도 공원을 산책하다가 매번 분수대나 연못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닉(니클라스의 줄임 애칭)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신다고 한다. 


도착해서 김제노 군(3)은 어리바리하는 사이 이미 홀로 당차게 입수하신 닉 군(1)
이른 시간이어서 아직 다른 개들이 많지는 않았다 - 한가로이 마음껏 풀장의 시원함을 만끽하는 니클라스 


 물속에 뛰어들어간 절친 닉의 모습을 발견한 제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음... 닉? 그.. 그런 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밖에서 풀장을 궁금해하면서 안절부절못하는 털아들을 풀장에 데려가려고 나는 리드줄을 끌어 계단으로 데려갔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우리 제노는 다소 늦된 면이 있다. 머리가 나쁘다거나 지능이 좀 어떻다고 표현하기보다는 조금 느리게 가는 편을 선호하는 녀석이라고 우리 가족은 열심히 팔을 안으로 굽혀 안아주고 있다. 어쨌든 우리 늦된 아들내미는 계단을 무섭다면서 한사코 거부했다. 웬만하면 계단 너머로 억지로 끌고 갔을 텐데 겁에 질려 완강하게 저항하는 성견 허스키를 끌고 미끄러운 계단을 오르내리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고두고 이야기하지만, 정말 아주 조금만 머리가 돌아간다면 너도 나도 참 편해질 텐데 말이야. 그렇지 제노? 


 결국 계단은 쿨하게 포기하기로. 


계단을 포기한다면 남은 길은 월담뿐... 그리고 널 들어올려 풍덩시켜야 하는 아빠는 참 힘들다 이 하얀 멧돼지야


내가 땡볕에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싶었다. 다른 아이들이 계단으로 오가는 걸 봐도 제노는 계단을 끝까지 믿지 않았다. 
결국 억지 입수 완료. 김제노 멘붕. 니클라스는 마냥 행복.
뭐, 벌써 꺼내달라고?


 계단을 이용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아들내미를 억지로 입수시킨 나는 녀석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걸 목격했다. '아버지여 나를 어찌 이곳에 던져버리시나이까' 분명한 멘탈붕괴였다. 수심이 깊지 않아 수영을 하기엔 무리였다. 그렇다고 옆의 깊은 풀에 던져 넣자니 얕은 곳에서도 저렇게 멘탈이 무너져 가장자리 벽에만 붙어 있는 녀석이 생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계단을 이용하지 않는 녀석을 어깨 높이가 넘는 펜스의 풀장에 던져 넣는 일이었다. 나도 제노도 영영 짊어지고 갈 부상이라도 입을 것 같아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얕은 풀장에 낑낑거리며 제노를 밀어 넣는 모습을 모두가 신기한 듯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저 허스키는 계단을 이용하지 않는 걸로 보아 분명 무슨 사연이 있을 거야' / '계단을 무서워하는 걸 보니 계단에서 굴러서 다친 적이 있나 보군' - 부디 모두가 이렇게 생각해주었길 바랄 뿐이다.


그래도 조금 시간이 지나니 닉과 함께 어울리기 시작한 듯 보였으나...


그냥 계단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 신기해하는 중일 뿐이었다


나중에 합세한 덩치 친구 카이저(셰퍼드) / 묘하게 제노에게 다가오는 녀석들을 질투하는 듯한 닉 / 물속에서 멘탈이 붕괴된 김제노



 물을 썩 즐거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인상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더운 날씨에 시원한 곳에 들어가 있으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개들을 위한 행사라 개들만 시원한 물에 몸을 담그니 밖에서 지켜보는 우리 인간은 작렬하는 태양과 뜨거운 열기에 점차 쪼그라들어갔다. 급기야 더위와 어수선함을 참다못한 우리 집 대장님 햇살이가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고 이는 철수를 알리는 종소리와도 같았다. 


 제노는 계단을 싫어했다. 이해를 못했다기보다는 계단에 관한 무언가가 죽도록 싫었던 것이라고 믿겠다. 이번에는 젖어서 더욱 무거워진 멧돼지를 물밖으로 끌어올려야 했다. 하아.....


옆 가판대에서는 반려견 전용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다 - 제노는 코코넛밀크 아이스크림으로 결정!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 햇살이는 유모차에서 곤히 잠들고 제노와 니클라스는 흠뻑 젖은 채 물놀이로 지친 몸을 이끌고 쭐래쭐래 따라왔다. 


제노, 니클라스, 우리는 식사하는 동안 너희는 여기서 얌전히 간식 먹고 있어-


잠든 햇살이까지 아가들 셋- 


지친 아가들 셋을 옆 테이블에 재워(묶어)두고 우리는 버거킹


 사랑하는 자식이 즐겁게 뛰놀고 지쳐 곤히 잠든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땡볕 따위 조금의 고생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점점 나도 제 2 세대가 되어가는구나 싶은 요즘이다.




 확실히 서양의 반려 동물 문화는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정서와는 현격히 다르다. 반려 동물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공간과 계기를 확실하게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정서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얼마 전 최근에 개장한 반려견 전용 놀이터가 인근 주민들의 반대와 민원으로 급히 폐쇄 조치를 당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동시에 양쪽의 입장이 모두 이해가 되기도 했다. 


 반려견주의 입장으로 보자면 반려견들이 마음껏 뛰놀 공간을 반대하면서 사람들이 개를 끌고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거부 반응을 보이고 질색을 하니 대체 어쩌라는 노릇인지 억울하고 답답하다. 반대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반려견을 데리고 다닌답시고 긴 목줄을 채우거나 심지어는 목줄을 채우지도 않고 돌아다니며 자기 개를 제대로 통제도 못하고 여기저기에 대소변을 남긴 뒤 제대로 치우지도 않는 사람들이 밉다. 사실 양쪽 입장이 다 이해가 가기 때문에 어느 쪽이 일률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제노를 데리고 다니면서 반려견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좋은 쪽으로 바뀌길 기대했지만 공원이나 풀밭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개똥이나 아무 곳에나 휘갈겨놓은 소변이 흐르는 광경을 보자면 개를 싫어하는 사람들, 견주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된다. 또한 목줄을 풀어놓고 우리 개는 안 문다고, 순하니 괜찮다고 과민반응 말라는 견주분들도 제법 보이는데, 이분들이 크게 착각하는 부분이 있다. 목줄이 풀려 있는 개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개가 물 것 같아서 싫다거나 개의 성격이 어떻다를 따지기보다 지나다니는 길에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변수가 존재한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다. 이는 어두운 골목길에 불량 청소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그곳을 지나가야만 하는 느낌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반려견에 대한 문화를 개선하고 나아지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반려견과 견주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하며 이는 전적으로 반려견과 함께하는 우리 견주들의 책임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물론 무조건적인 반려견과 견주에 대한 혐오나 거부반응 역시 지양되어야 할 것이나, 대부분의 경우 반려견 문화에 질색하는 분들은 애초에 반려견 그리고 견주로 인한 어떤 불쾌한 경험이나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례가 많기에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은 우리 견주들이라고 생각한다. 


 견주들이 각자 대소변을 잘 치우고, 목줄을 잘 착용하여 산책을 하고, 다소 공격적인 성향을 보일 경우 입마개도 착용하고, 자기 반려견을 충분히 훈련시켜 통제한다면 지금 사회에 만연한 반려견/견주 혐오 및 기피 현상은 씻은 듯 사라지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우리는 분명 모두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




 조금 이르게 여름휴가도 다녀오고 날도 지나치게 더워 쉽게 지쳐버린 탓에 이번 연재글이 상당히 늦어진 것만 같다. 여름은 참 힘들다. 제노도, 햇살이도, 제노 엄마도, 나도 더위를 많이 타는 탓에 더욱 괴롭다. 그럼에도 어찌어찌 버틸 수 있는 것은 가끔의 물놀이와 더운 와중에도 즐거웠던 시간들의 사진과 기억이 남아 시원한 위로가 되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시원한 물놀이의 기억을 품은 제노가 부디 여름을 무작정 싫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무덥고 힘들지만 여름에는 물놀이라는 게 있잖아!?'라고 말이다. 


 


다음 글 예고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XXXIII : '새벽 산책(사랑의 훼방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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