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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음에 대한 찬양

by WriteWolf


이분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성공-실패, 부-가난, 효율-비효율, 선-악, 긍정-부정, 좌-우 등 우리는 항상 형태만을 달리 하는 양극 사이에서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하며 나아간다. 그 누구도 인간에게 왼쪽과 오른쪽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마치 낮밤과 같은 진리인 양 좌우를 구분해내려 애를 쓰면서. 어쩌면, 명확한 것이 없어 보이는 이 세상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억지 기준선을 긋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길을 걷던 중 어느 광고판에서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 적이 있다. 광고의 주제나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상식을 바탕으로 생각하면 쓸모없다는 표현은 '정상적인 사회 및 경제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이라는 의미일 것이나, 과연 '사회 생활과 경제 생활'이 인간으로서의 효용과 존재 가치를 결정짓는 척도가 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누군가와 교류하기 위하여, 혹은 돈을 벌고 쓰기 위하여 살아가는 것인가. 백 번 양보해 그렇다고 인정한다면, 과연 그러한 이유들이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근본이자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모두가 쓸모없는 것을 싫어한다. 쓸모없기 때문에 싫어한다. 다시 말해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싫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존재들은 대체 언제부터 '쓸모없음'을 뒤집어 쓰게 된 것일까.


어릴 적 나는 구슬치기를 좋아했다. 바둑알을 가지고 두는 오목도 즐겼고, 열심히 미니카를 굴리거나 과자는 먹다 말고 '따조' 모으기에만 혈안이 되기도 했었다. 무늬가 예쁘게 들어간 구슬은 항상 마지막 경기에서 꺼내는 일종의 필살기였고, 바둑알에 가끔 섞여 있는 반질반질한 재질의 돌은 승부를 결정짓는 한 수를 위해 아껴놓곤 했다. 너무 굴려서 다 타 버린 전기모터도 그 장렬함을 기린다며 명예의 전당 박스에 모았고, 교도소에서 담배가 현찰이고 권위이듯 따조는 등교부터 하교 시간까지를 책임지는 부의 상징이었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오늘날, 지금의 내게는 구슬도 바둑알도 따조도 미니카도, 어느 것 하나 '쓸모 있게' 느껴지는 것이 없다. 과거의 한 단면을 떠올리기 위해 창고 어느 깊숙한 상자에 먼지와 함께 잠들어 있을 일종의 메멘토(memento)일 뿐,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성인으로서 '실질적인 가치'라고 여길 만한 일말의 성분도 담고 있지 못하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어느 창고 구석에 소중한 듯이 잠들어 있을 구슬들은 내 키가 1미터 근처였던 무렵부터 지금까지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채 그대로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내가 찾아낼 마음만 먹는다면 기꺼이 발견되어 마치 어제의 구슬치기 시합을 오늘 재개하듯 창고 밖에서 흘러간 세월을 잊고 또르르 구를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구슬을 굴리고 보관했던 어제의 그 소년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구슬을 가지고 놀았던 날도, 소중한 보물을 숨기듯 보관함에 살포시 넣은 날도, 그 보관함이 '쓸모없는 것'으로 분류되어 창고에 처박힌 날도, 그 어느 날도 몇 년 몇 월 며칠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나 역시 그들에게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그날을.




행복의 3분의 1은 앞으로를 공상하는 것에, 3분의 1은 현재를 즐기는 것에,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좋았던 기억을 추억하는 순간에 깃들어 있다. 그중 미래에 대한 공상은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뜬구름일 뿐이고, 현재는 즐길 수 없는 형태로 주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행복의 3분의 1을 확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따뜻하고 소중한 과거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품에 간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 순간 삶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행복했던 순간 혹은 사건들을 떠올려보면 그 어느 하나 이른바 '실질적인 가치'나 그것을 향한 추구의 과정 혹은 결과와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복권에 당첨된 순간을 떠올리는 사람도, 일확천금이나 사회적 성공을 거두었던 순간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테지만 그것은 '기쁜 것' 내지는 '충격적'이거나 '인상적인' 순간일지언정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에 품고 싶은 따뜻함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것이다.


[선물 받은 꽃을 안아 든 순간, 수줍은 고백을 들은 순간, 부모님의 애정을 느낀 순간, 성취감에 벅찼던 순간, 잊고 지내던 보물을 다시 발견한 순간, 부모가 된 순간, 이게 바로 행복이구나 깨달은 순간, 소중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순간]


어느 하나 지금 이 순간 사회적으로 '쓸모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니다. 내일 있을 면접의 질문도 아니고, 거래처와의 미팅에서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내용이나 투자 정보도 아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저와 같은 '쓸모없는' 기억들을 쉽게 제쳐두거나 부질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실은 그러한 쓸모없음이 인생에서 가장 쓸모 있는 것임을, 내심 깨닫고 있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눈을 떠보니 모두가 걷고 있었다. 발걸음이나 속도는 제각각이었지만 그래도 다들 어디론가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왠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따라 걸었다. 함께 걷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유 없이 분주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묻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고 계세요?" 열 명에게 물으면 열두 명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대답은 없었다. 낙담한 나는 질문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이번에는 열 명중 여덟 정도가 냉담하게 무시했고, 그중 두 명 정도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들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를 떠올리려 애썼다. "어디서 왔니 꼬마야?" 드물게 눈에 띈 꼬마에게 물었을 때였다. 꼬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되물었다. "그러는 너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가늠할 수 없던 나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 모두에게서 뒤쳐지면 안 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던 세계가 일순 정지해버린 것이다. '나는 대체 어디에서 출발했던 거지?'





아무리 감상에 젖어도, 비현실적인 활용방법을 고안해내려 애를 써도 지금 내 손에 구슬 다섯 개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함께 열띠게 시합할 상대도 남아있지 않을뿐더러, 규칙마저 가물가물했다. 창고에서 꺼내 소중하게 선반이나 장식장에 모셔 놓는다 해도 특별히 구슬들이 기뻐하거나 '쓸모없는' 그 녀석들의 존재가 재조명될 것 같지도 않았다.


마치 활용할 수 없는 '추억'을 놓고 전전긍긍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활용해야만 한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실용주의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 존재의 의미와 역할을 되살리고자 하는 일종의 '부활 프로젝트'였다.


결론에 도달한 것은 거미줄 짙게 드리운 오랜 대성당 그림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너무나 오래 방치되어 역사를 가늠할 수도 없는 일종의 화석과도 같은 건물 형상에는 어떠한 '활용도'나 '쓸모'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다. 일종의 '화석'이었다.


어릴 적 새로이 발견되었다는 화석들을 관람하면서 언젠가 어른이 되면 진짜로 살아있는 공룡을 찾아내고 말겠다는 꿈을 품은 적이 있었다. 물론 내 꿈이 비행기 파일럿, 또다시 야구선수로 넘어가기 전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어린 마음에는 지순하고도 당찬 포부가 잠시나마 담겨 있었다.


공룡의 잔재인 화석이 한 아이의 마음에 꿈을 심어줄 수 있었다. 같은 논리로 따뜻한 기억의 화석인 추억의 메멘토들이 어른들로부터 다음 세대들에게 주어질 수만 있다면, 마음이 갈림길에서 방황할 이정표가, 파도에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의 닻이 수 있으리란 희망은 지나친 것일까?




'희망'의 반의어는 사전에 표기되어 있지 않다. 모두가 희망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이 사회의 따뜻한 배려일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도 희망의 반의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절망, 좌절, 난망 등의 단어는 엄밀히 말해 희망 자체와는 무관하며, 희망에 반대되는 유일한 개념은 희망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뿐이다.


쓸모없는 모든 따뜻한 추억이, 쓸모없어진 모든 존재가, 한때는 누군가의 희망이자 보물이었으며 그러한 따뜻함이 끊임없이 전승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아이들이 깨닫는다면,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영원히 찾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슬은 여전히 창고에 잠들어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깨끗하게 씻어 볕을 쪼일 셈이다. 가지고 놀기 위함도, 전시하기 위함도 아니다. 곧 태어날 아이가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면, '옛날엔 이런 놀이가 있었단다'하고 하나하나 구슬을 만지고 굴리게 해주고 싶다. 비록 아이의 시대에서는 공감받거나 유행할 수 없는 놀이겠지만, 또한 구슬에 대한 나의 감상과 추억을 공유할 수는 없겠지만, 아빠와의 교감과 소통으로서의 기억이 '구슬'이라는 매개에 고스란히 담길 것임을 알기에.


이런 생각이 든다. 구슬 하나에 담길 수 있는 따뜻한 기억과 감상은 무한하구나. 어쩌면 계속 변해가는 쪽은 우리뿐이구나. 하는,



삽화 : Cover . Tjalf Sparnaay 作 / ⅰ. Michael Peck 作 / ⅱ. Morgan Weistling 作 / ⅲ. Jonathan Ahn 作 / ⅳ. Zdzislaw Beksinski 作 / ⅴ. Friedrich Hechelmann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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