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루(蜃氣樓)라는 현상이 있다. 이는 물체가 실제가 아닌 위치에서 보이는 현상으로서 불안정한 대기층에서 일어나는 빛의 굴절 현상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예를 들자면 사막에서 지평선 근처의 오아시스를 목격했으나 다가가 보니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다거나, 망망대해 위에서 갑작스레 수평선 너머로 도시의 모습이 나타나는 현상 등을 말한다.
흔히 말하는 '행복'이라 불리는 목표를 좇는 여정이 이 신기루의 자취를 따라 향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이 방향이 맞는 것 같아 다가가면 차차 희미해지더니 어느 새 사라져 있고, 그래서 좌절해 있으면 또다시 시야에 나타나곤 하는 순간들의 반복이 바로 행복을 좇는 여정이 아닌가 싶었다. 얼마 전, 수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 한 분이 자신의 삶의 이유를 두고 '행복하기 위하여 살아간다'고 표현했다. 나는 반문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가요?" 돌아온 대답은 멋쩍은 미소와 침묵이었다.
답은 조금 부족했을지언정 나는 속으로 탄복했다. 다소 추상적이고 상투적인 표현이었지만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처럼 당당하고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90명 중에 1명 꼴이기 때문이다.
상식을 받아들이자면, 우리는 분명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잔혹하고 염세적으로 파헤쳐보면 각 인격이 지향하는 행복의 그림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지구상의 인구가 70억이라면 70억 가지의 이상적인 행복한 삶에 대한 상像이 존재해야 마땅하기에. 이론은 그렇다. 이론은.
때때로 신기루가 보인다. 솔직히 그것이 신기루인지, 혹은 나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환영幻影인지는 분간할 방법이 없다. 다만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은 거리에서 항상 맴돌기에 나 자신을 환영이 보이지 않는 '정상인'의 범주에 넣고자 신기루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옛사람들도 그렇게 느꼈겠지만, 신기루는 보는 이로 하여금 '보고자 갈망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 현상이 자주 일어나는 사막에서는 물을 머금은 오아시스를, 드넓은 바다 위에서는 육지나 도시의 모습을 비추었다. 그야말로 모두가 목숨 걸고 좇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형상이었던 것이다.
신기루 현상과 환영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그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보이느냐, 그렇지 않으면 특정한 개인에게만 보이느냐 여부다. 바로 여기에서 '행복'이라는 것이 신기루 현상에 가까운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환영에 가까운 것인지 판가름날 것만 같았다. 많은 이들이 행복이라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일정한 방향을 향해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결국 행복은 신기루에 가까운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신기루란 막상 그곳에 도달하면 실존하지 않는 존재의 모습을 비추는 현상이다. 만일 행복이라는 가치가 신기루의 성질에 가까운 것이라면 막상 목표 지점에 도달해도 그곳에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고 만다. 모두가 갈망하고 가까워지기를 바라마지 않는 별빛이 사실 허상이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신기루 현상과, 행복의 본질은 대체 무엇일까.
답을 찾는 데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혼자만의 속단을 두고 '답'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런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나는 용기를 내어볼 셈이다. 누군가는 모두의 앞에서 당당하게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 살아갑니다"라고 답하는데, 혹시나 틀렸을까 봐 눈치 보고 겁내는 비겁자는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신기루 현상과도 같다. 행복이라는 녀석은 모두가 '저기에 행복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도록 한 방향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는 목마른 사막 여행자에게 오아시스를, 육지를 찾아 헤매는 항해자에게 번화한 도시의 모습을 비추는 신기루의 성질과도 같은 것이다. 일단 그러한 광경을 목격하고 나면 여행자도 항해자도 다른 모든 것은 제쳐두고 그러한 형상이 얼핏 비추었던 곳을 맹렬히 향하게 된다. 마치 그 길만이 살아남고 내일이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기면서.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행복이라는 녀석과 신기루라는 녀석의 공통적인 성격이 있다. 실은 두 녀석 모두 지독한 장난꾸러기라는 점이다. 마치 거울을 이용해 자신의 위치를 속이듯, 그곳에 있지 않으면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그곳에 있는 것처럼 여기게 만든다. 그리고는 절박하게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순수하게 깔깔 웃어댄다. 못된 녀석들이다. 사실은 100km 남쪽에 있으면서 50km 북쪽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100해리 거리에 있으면서 20해리 지점에 모습을 나타내어 이쪽이라고 손짓한다. 신기루도 행복도, 그런 녀석들이다.
고민을 해 보았다. 이 녀석들을 어떻게 혼내 줄지에 대한 고민은 아니었다. 어차피 행복이라는 녀석은 함께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라 굳이 붙잡아 혼을 낸다고 인생이 더 나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고민한 것은 그 녀석들을 장난스러운 손짓을 보고도 무심한 척, 모른 척 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 녀석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진짜 둥지를 찾을 수 있을까였다. 그래서 짐짓 여유로운 척 카페에 앉아 주변의 모든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들 마냥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무얼 하고 싶다는 마음, 무얼 갖고 싶다는 마음, 어딘가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다 제쳐두고 마치 성숙하고 단단한 어른인 척 신문을 열독 하는 척 하면서 연신 뜨겁고 쓴 커피를 들이켜댔다.
예상은 적중했다. 역시나 신기루와 행복은 꼬마 아이였다. 골려먹이려던 어른이 자신들의 모습이나 행위에 무관심한 듯한 모습을 보이자 이내 자신들의 장난에 흥미를 잃고 만 것이다. 신기루는 종적을 감추었고, 행복도 제 위치로 돌아간 듯했다. 왜냐하면 다시 드넓은 지평선의 사막이, 끝없는 수평선의 물결이 펼쳐졌으니까.
어쩌면 신기루 속의 도시는 신기루가 보이던 지점에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 반대 방향으로 열흘을 달려야 하는 곳에 위치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보이는 곳 훨씬 너머에. 다만 신기루에 대해 한 가지 확실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어딘가에 '실존'한다는 사실이다. 실존하기에 우리 모두에게 보이는 것이며, 어딘가에 분명 존재하기에 다소 왜곡된 형태로라도 상이 맺히는 것이다. 다만 지금 당장 모두의 눈에 보이는 방향, 그 거리, 그 위치가 아닐 뿐. 행복이라는 녀석이 신기루의 가장 친한 친구라면, 그 녀석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문득 든 생각이지만, 어쩌면 녀석들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딱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이 사막을 걷는 나의 배낭 안에서 찰랑거리는 수통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작은 돛단배의 갑판 한 구석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저 멀리 또 신기루가 보인다. 도시의 형상인지, 별빛인지, 산맥인지, 아무튼 보인다. 하지만 그 방향으로 향하지 않는다. 그럴 이유가 없다. 신기루는 하나의 신호다. 그러한 가치가, 존재가, 형상이, 이 세상 어딘가에 실존하고 있다는 신호이자 목소리인 것이다.
어딘가에 도시가 깨어 있다. 어딘가에 별이 빛나고 있다. 어딘가에 산맥이 놓여 있다. 비록 저곳이 아닐지라도. 행복이라는 것을 찾아 나서겠다던 결심이 어쩐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왠지, 찾아 나설수록 다가가려 할수록 멀어지게 될 것이라는 직감이 들어서,
삽화 : Cover . Michael Cheval 作 / ⅰ. Jeremy Gedes 作 / ⅱ. Keith Haring 作 / ⅲ. Michael Peck 作 / ⅳ. Michael Flohr 作 / ⅴ. Pol Ledent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