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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Aug 21. 2015

비상飛上 강박증


 한창 싸이월드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의 미니홈피라는 공간에 가 보면 좌측에 대문글이라는 섹션이 존재했다. 개인적인 감상이나 각오를 적어놓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를 향한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공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던 그곳에서, 공통적인 함의를 담은 어구들이 눈에 띄었다. 바로 '새로운 시작'이나 '날아오르자'는 등의 희망찬 문구들이었다.


 때로는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고 충분한 행복감을 만끽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적어도 한 번쯤은 저와 같은 비상飛上을 꿈꾸는 문구를 써본 경험이 있을 거라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이들이 현재의 상태를 '지상에 속박된 정체 상태' 혹은 '무언가 더 높은 곳을 향한 준비 기간'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 마치 집단 무의식의 발현처럼 어떠한 열망이 공유된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느졌으며, 싸이월드  사그라든 오늘날에도 머릿속에서는 현재 진행형 물음표로 남아 있다.  




 솔직히 말해 그 흔한 '날아오른다'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돈을 많이 버는 것? 사회적인 명예나 실권적인 권력을 손에 넣는 것?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진 상태를 묘사하는 표현인지도 모른다.

 

 경제적인 문제가 발목을 잡는 삶, 생계가 해결이 되어도 명예롭지 못한 삶, 실권이 없는 삶. 다들 벗어 던지고 싶은 속박이 즐비한 삶을 살아간다.


 오늘의 빈 손은 내일의 빵 조각을 꿈꾸고, 내일의 빵 조각은 모레의 고기 덩어리를 꿈꾼다. 어쩌면,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대지 위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유대감이 바로 '비상飛上 강박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도  그중 하나다. 대표적인 한 명이다.



 엄밀히 따져보면 돈에 대한 결핍, 명예에 대한 결핍, 권력에 대한 결핍, 애정에 대한 결핍 등 모든 형태의 결핍은 땅에 두 다리를 뻗고 살아가는 우리 필멸자들에 있어 산소나 햇빛과 같은, 일종의 운명이다. 물론 그 모든 결핍이 '없어 보이는' 존재도 분명 있다. 내 생각엔 그러한 존재가 지구라는 행성 숫자만큼만 존재할 것 같다.


 무언가가 결핍된 현실이란 초록색 숲이나 푸른 빛 바다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 생태인 셈이다.


 과거  , 결핍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누가 보아도 그의 유일한 결핍 '결핍의 결핍'다. 자신의 삶에 부족한 부분이 없어 보인다는 사실을 자신도 인정한다고, 그는 말했다. 이어진 그의 말은 예상 밖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행복하지 않다고, 행복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방향을 깨닫고 있지만 그 길이 완전히 막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딱히 죽을 이유가 없어 살아 있을 뿐 살 이유가 있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고.


 얼마 전 우연히 그와  마주쳤다. 대화를 나누었던 과거로부터 몇 년 뒤, 그는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내던지고 행복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방향으로 뛰어들었다. 다시 만난 그의 표정은 행복으로 가득했다. 이전에 누리던 모든 충만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그와 같은 일반적인 결핍들이 자 마음을 괴롭히지만 그와 같은 선택에 대한 일말의 후회도 남지 않는다고, 웃으며 그리 말했다. 


그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정형화된 개념 '행복'이다. 물질적인 안정, 정신적인 평화, 육신의 평안 등 당연해 보이는 가치들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가? 우리는 경제적 안정을 무시한 일탈적 쇼핑을 통해 흥분과 쾌감을 얻기도 하며, 서슴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영화 속 멋진 악당을 바라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높고 추운 산을 오르며 육체의 극한을 경험하면서 희열과 성취감을 느끼기도 하고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압력이 밀려드는 바닷속에서 해방감을 느끼기도 한다. 참으로 역설적인 존재가 아닌가.


 날아오르고 나면 땅에 발 붙이던 시절에 하던 고민으로부터는 해방되겠지만 어디에 착지해  쉬어갈지, 어느 방향으로 날아야 할지, 다른 날짐승들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따위의 고민거리가 다시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




 무엇이 옳거나 그르다거나, 이래야 한다거나 저래야 한다거나 하는 말들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옳다는 것들이 지나치게 많다. 그르다는 것들 역시 지나치게 많다. 이래야 한다거나 저래야만 한다는 것들 투성이다. 20대에 해야 할 일은 3천 가지 이상. 30대에도 그만큼 많단다. 좀 쉬고자 하는 70대에도 후회하지 않으려면 해야 할 일들이 쌓여있다고들 외쳐대는 바람에, 인간 본연의 고요한 행복이 사라져버린 것만 같다.


 '날아올라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지 말자고 외쳐봐야 어차피 가질 사람들은 가지게 되어 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행복한 표정을 짓던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항상 내가 어딘가를 날고 있다고 생각했어. 실상은 일상적인 결핍이 없다 보니 땅에 발 붙이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말이야. 항상 무언가가 나를 이 땅에 묶어주길 희망했어. 두 발 붙이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이젠 예전처럼 하늘에 떠 있는 형상으로 살아가지는 못할 테지만, 그래도 전혀  상관없어. 내가 있어야 할, 땅 위의 보금자리를, 길을 찾았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땅에서 태어난 존재의 길은, 항상 땅 위에 있는 법이더라."




삽화 : Marco Monaldi 作 (커버) / ⅰ. Eric Bowman 作 / ⅱ. Hamish Blakely 作 / ⅲ. Carol O'malia / ⅳ. Dmitry Kustanov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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