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라는 명제가 있다. 일개 인간이 논하기엔 지나치게 거대하고 견고하게 느껴진다. 세상 모든 것을 거슬러도 마지막 관문에는 늘 고요하고 거대한 흐름, 시간이 버티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서른인 내가 앞으로 스물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스물이던 내가 유년기로 돌아갈 수 없음에 아쉬워했던 것처럼, 영화에서처럼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일은 없다. 1년은 365일이며, 1일은 24시간이다. 1시간은 3600초이며, 1초는 실감할 수 없는 찰나들로 끝없이 쪼개어진다. '이미 오래전 세는 것을 그만두었지만, 가끔은 내 나이가 궁금해진다.'는 구절을 읊은 이가 어쩐지 부러워진다.
'내 나이는 올해 몇이다. 그러니 젊은 시절은 약 몇 년 정도 남았고, 중장년, 노후는 각각 몇 년도쯤부터겠군.'
현대인의 일반적인 인생 셈법이다. 언제까지가 청춘이자 젊은이로서의 기간이고, 언제부터 기성세대로서의 시절이 펼쳐진다는 정확한 기준은 없다. 다만 사회적인 암묵적 동의는 분명 존재한다. 그처럼 인생을 계절로 나누고, 이에 맞추어 삶을 계획하고, 목표를 세우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과정은 인간으로서 갖는 보편성이자 자연스러움일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인생에 그어진 시간의 단위와 그에 따른 암묵적 제약들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꿈꾸어본다.
소년이 청년으로, 청년이 성년으로 탈피하는 순간을 규정할 도리는 없다. 다만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를 어리다고 규정하는 순간 소년을 바라보는 청년이 되고, 존재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순간 진정한 성년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만 20세라고 해서 이른바 진짜 어른일 수는 없다. 당사자는 모든 제약이 풀려 세상을 호령하는 듯한 모습이라 스스로를 여기지만 실상은 어두컴컴한 굴에서 기어 나와 드넓은 평원을 향해 끼룩댈 뿐인 새끼 사자와도 같다.
이름 옆에 붙은 숫자만으로는 그 인생의 질과 굴곡, 그리고 깊이를 판단할 수 없다. 이는 큰 폭력이다. 다 큰 사자도 책임을 짊어져 본 적이 없다면 영원히 사춘기 맹수로 남을 수밖에 없다. 365일만이 의미 있는 시간의 단위라거 30세가 성숙의 기점이라고 하는 등의 강압적 정의에는 동의할 수 없다. 동시에 다른 존재의 온전한 무게를 짊어진 경험이 있다면 이름 옆의 숫자가 비록 17, 혹은 13이라 해도 완연한 성년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20대 중반이니까 그럴 시기지, '
'40대 후반인데도 아직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린 거야, '
'50대를 훌쩍 넘겼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
딱히 틀린 표현은 아니다. 다만 무례하다.
어느 경직된 틀에 우리네 삶을 억지로 쑤셔 박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므로.
'태어나 처음으로 용기를 냈던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한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두려움에 맞서 행동한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를 소중하게 여기게 된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실연을 맛 본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세상에서 누군가를 떠나보낸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자기 자신보다 다른 누군가를 우선순위에 두었던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큰 후회를 했던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후회를 남기지 않았던 순간'
우리는 이 모든 순간들의 장면과, 느낌과, 감정과, 어쩌면 냄새와 습도까지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만일 인생에서 숫자라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요소라면 각 순간들이 몇 년, 몇 월, 몇 시 몇 분 몇 초에 벌어졌는지 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존재를 성장시킨 이와 같은 순간들을 숫자적 형태로 기억하는 사람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이를 토대로 감히 '시간이라는 개념에서 파생되는 숫자 따위는 무의미하다'는 궁극적인 결론을 내렸다. 이로부터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손해 본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삶의 흐름이 자연스러워졌다. 남들이 노심초사할 때 밀크 셰이크 한 잔을 더 주문할 수 있는 여유가,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식은땀을 흘릴 때 조용히 눈 감고 오늘 저녁은 뭘 먹을지 고민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언젠가 받았던 연서에 적혀 있던 '박제된 시간'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그리운 대상에 대한 기억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졌으므로. 방금 확인해 보니 정작 그와 같은 표현을 쓴 이도 그 박제된 시간이 몇 년 몇 월 몇 시 몇 분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결국 시간이란 머리나 이성으로 좇는 것이 아닌, 바로 가슴으로 좇아야만 비로소 접점에 도달할 수 있는 일종의 마음속 약속 장소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는 길에 놓인 이정표나 시간의 칸막이를 따르지 않는다. 그저 길 자체의 감상과 풍광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 뿐이다.
어린 마음에 누군가를 기다리며, "몇 밤 자면 와?"라고 어른들에게 묻던 시절이 있다. '열흘 뒤 오전 10시 30분 도착'이라는 정확함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오늘보다, "열 밤만 자면 온대. 그러니까 오늘만 코 자면 아홉 밤 남는 거란다"는 말을 듣고 아홉이라는 숫자가 손가락 몇 개인지도 잘 모르면서 설레던 어린 가슴이 너무도 멀게 느껴진다.
정확, 효율, 정밀, 정교함이란 삶에서 참으로 소중한 가치이다. 그러나 때로는 막연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많은 이들이 인생의 봄날을 기다린다. 누군가는 정확하게 계산을 하며 달리고, 누군가는 움직이지 않은 채 그저 막연하게 기다린다. 몇 개월 뒤 몇 시간 몇 분 뒤에 봄날이 찾아올 것이라는 정확한 귀띔이 없기에 인생은 낭만적이다. 또한 살아갈 만한, 살아볼 만한 가치를 품는다.
시계는 그저 답을 내기까지의 계산기일 뿐, 정답 그 자체는 아니니까.
삽화 : Salvador Dali 作 (커버) / ⅰ. Michael Peck 作 / ⅱ. Steve Hanks 作 / ⅲ. Fabio Minciarelli 作 / ⅳ. Vladimir Kush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