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게도 항상 눈을 감으면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비롯된 공상이고 감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현실에서 발버둥치다가 잠시라도 눈을 감고 쉬려 하면 늘 숲 속에 놓인 스스로를 발견했다.
펼쳐지는 광경은 아름다운 수목들이 펼쳐진 숲이 아니었다. 어두울 정도로 수목이 빽빽하고 스산한 숲속인 탓에 어디로든 일단 움직여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사지가 온전히 붙어 있기는 한 건지, 마실 물이나 음식은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지 따위의 의문도 들지만 어쩐지 공상의 세계는 그와 같은 현실적 제약에 구애받지 않는 듯했다. 대책 없이 마음이 놓였다.
글쎄,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돌이켜보면 세상에 태어나던 순간에도 이처럼 막막함과 하릴 없음이 엄습해오지 않았을까. 이제는 왜 아기들이 태어나면서 우는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삶이라는 거대한 질서. 항거할 수 없는 흐름. 눈앞에 놓인 운명 앞에서 갓난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걸 내려놓고 목청껏 울어제끼는 일밖에 없을 테니까.
세상의 먼지를 뒤집어쓰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고 새삼 무게를 잡다가도 갓 태어난 순간처럼 마음 편히 울음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떠오를 때가 있다. 다만 마음껏 울기에는 너무나 감안해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어른이라서, 쉽게 그럴 수 없어지고 말았다.
어느 새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반쯤 파묻혀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숲에는 길이 나 있는 듯 실제론 없었다. 열심히 초목을 헤치고 달려 드넓은 평원으로 뛰쳐나가거나 사막으로 굴러들어가는 장면도 떠올려보았다. 그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숲 속에서 눈을 뜨는 장면으로 돌아가 있었다.
앞이라는 개념, 뒤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 원시림에 내던져진 주인공은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존재'를 상징했다. 그곳에서는 더 '낫다'거나 '못하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다. 답답했지만 근원을 알 수 없는 안도감과 편안함이 함께 몰려왔다.
눈을 뜨는 시간은 항상 숲이 이슬에 젖은 이른 아침이었다. 현실에서는 몸이 가장 무거운, 되도록 마주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기도 했다. 잎사귀들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내려오는 날에는 태양 근처에서 타오르는 촛불 마냥 스스로의 존재가 무색해 보였다. 어쩌면 생존하는 일에 무심해지면서 생겨난 안이함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맹수가 득실대고 밤만 되면 기온이 떨어져 저체온에 시달릴지도 모르는 현실 속 예쁜 숲과는 달리 내면의 못나고 침울한 숲은 어떤 불안감도 야기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이곳에 머무르는 한 너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울림이 숲 전체에 끝없이 퍼져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비좁고 어둡지만 세상 그 어느 곳보다도 따뜻하고 편안한, 마치 어머니의 양수에 잠겨 있는 기분이라고 해야할까.
꿈꾸는 숲을 걷는 여정은 다만 시작되었을 뿐 그 끝은 보이지 않는다. 과연 그 끝이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지만 지금은 잠시 흐름에 항거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숲 속을 걸어본다. 목표도 방향도 없이, 그저 거닐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 얼마만인가.
어른이 된다는 것이 어떤 방향을 골라 나아간다는 일이라면 그동안 어른이 되기 위해 무심결에 지나치고 포기해버린 아름다움이 얼마나 많았을지 상상만으로도 못내 아쉽다.
오늘 만큼은 잠시 숲속을 거니는 아이이기를.
잠깐의 산책이라도, '방향과 목표'라는 강박에서 부디 자유롭기를.
삽화 : Cover . Jeff Rowland 作 / ⅰ. Cristoforo Scorpiniti 作 / ⅱ. Alyssa Monks 作 / ⅲ. Donald Fox 作 / ⅳ. Ahmad Haraji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