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꿈꾸다

바다를 꿈꾸다

by WriteWolf


여느 월요일과는 다르게 몸이 가벼운 주말 아침 갑자기 떠오른 한 문장.


'오늘 같은 날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데!'


때아닌 탄식과 함께 떠오르는 장면 열 중 하나는 공항이나 기차역, 혹은 한적하고 푸른 바다와 가로로 길게 놓인 해변의 풍경이다. 굳이 야자수나 이국적인 밀크셰이크가 아니어도, 그저 차로 달려 4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부둣가여도 좋았다. '떨쳐 떠난다'는 표현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항상 바다로 흘렀다.






바다. 어느 하나 막힌 곳이 없는 공간이자 존재이자 형상.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침대를 뒤덮은 천장이 하늘과의 연결을 가로막았다. 몸을 일으키면 문과 벽이, 밖으로 나가면 온갖 신호와 건물들이 시야와 사고를 가로막았다. '그저 걷기'만 해도 좋은 길을 거닐어 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수 백, 수 천 번 반복되어 무심해진 출근길에서, 우리가 굴종해야만 하는 제약이 얼마나 즐비한지 새삼 되짚어본다. 신호등의 색깔, 차량의 통행, 대중교통의 연결, 스쳐가는 행인들의 자리, 반짝거리는 스마트폰, 언제까지 어딘가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는 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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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넓고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은 바다에도 길이 있다. 물결 위에도 거대한 상용 선박들이 지나는 길이 있고 작은 배들이 지나는 길이 있다. 순서가 있고 분명한 질서가 존재한다. 다만 우리가 모를 뿐, 파고는 늘 질서와 함께 일렁였다.


바다는 어떤 사람이건, 어떤 삶을 살아왔건, 다 감싸 안아 줄 것만 같은 거인처럼 느껴진다. 수평선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기분이다.


"괜찮아, 괜찮아, 여기 파도소리 바다내음으로 기분 풀고 가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 때로는 바다의 거대함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거꾸로 생각하면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땅, 즉 어디와 어디 사이의 괴리를 모두 메우고 있는 것이 바로 바다였다. 대양에서 느껴지는 근원적인 따뜻함이란 바로 이와 같은 '이어짐'에 대한 무의식적인 자각이 아닐까. 바다가 만일 텅 비어있다면 세상은 지금처럼 낭만적일 수도, 아름다울 수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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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과 손을 잡고 거니는 해변 모래사장, 실연의 아픔 속에 홀로 주저앉아 바라보는 야속한 바다. 이처럼 삶에서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은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기쁨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슬픔을 자아낸다. 마찬가지로 바다란 삶의 행복이 펼쳐지는 장소이자, 상처가 아무는 광대하고 조용한 쉼터인지도 모른다.




'공간적인 제약 없이 당장 거하고픈 장소'를 꼽으라면 어떤 이들은 숲이나 산골짜기를, 혹은 골프장이나 붐비는 여행지, 어쩌면 안온한 자신의 침대를 떠올릴 것이다. 그럼에도 조용한 바닷가를 떠올리는 이들은 항상 절대다수였다.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의 리듬. 밀려오고 쓸려가는 모래 알갱이. 눈이 닿는 가장 먼 곳 수평선. 이따금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의 조화는 어느덧 평온함으로 이어진다.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여기저기 상처 입거나 기진맥진할 때에도 바다만큼은 항상 같은 크기로, 박동으로, 표정으로, 그대로 있어줄 것만 같은 안도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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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고개를 돌린 사이에, 혹은 눈 깜박이는 새에 지나치게 많은 것이 변하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변치 않는 존재가 늘 곁에서 든든하게 넘실거린다는 것은 큰 위안이다.


하늘은 너무 멀어서, 그리고 어쩐지 비어있는 것만 같아 바라보아도 차분해지지 않았다. 숲은 어디론가 움직여야만 할 것 같아서. 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불안했다. 파도 소리는 밤낮을 구별하지 않았고 발끝을 촉촉하게 적셨다. 바다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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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뛰어들거나 빠지고 나면 바다만큼 무섭고 막막한 곳도 없다. 누구도 발을 받쳐주지 않으며 나라는 존재가 여기 떠 있다는 사실 따윈 개의치 않고 물결이 끝없이 밀려든다. 망망대해 위에 홀로 놓인 존재만큼 무력하고 나약한 것은 없다.


동시에 바다는 보는 이로 하여금 꿈꾸게 한다. 여기가 끝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저 수평선 너머의 세상을 넌지시 가리킨다. 괴팍하고 심술궂지만 어쩐지 이 거대한 노인의 장난기는 따뜻하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마음의 안정감을. 안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모험과 도전의 활로를 안겨주는 바다의 모습은 마치 이상적인 부모처럼 느껴진다.




꼭 조용한 해변이 아니어도 좋다. 때로는 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에 언뜻 비친 푸른 빛이어도, 때로는 둑길 아래에 펼쳐진 갯벌이어도 좋다. 살아간다는 것이 유달리 버겁게 느껴지는 날에는 잠시 바다를 꿈꾼다. 직접 달려갈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시간, 현실, 여유와 같은 장애물들이 산재해 있다. 그러니 누구와도 싸우지 않고, 조용히 바다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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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를 미끄러지는 여행자들을 위한 육지의 불빛을 두고 등대라 한다. 역설이지만, 우리 삶이 힘과 길을 잃었을 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바다. 길을 다시금 짚어볼 수 있도록 영감을 제공하는 바다야말로 우리 삶의 진정한 등대가 아닐까.





삽화 : Cover . Edward Gordon 作 / ⅰ. Alexei Adamov 作 / ⅱ. Steve Hanks 作 / ⅲ. George Dmitriev 作 / ⅳ. Arturo Samaniego 作 / ⅴ. Kyle W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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