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바라만 보는 곳이라 생각했다. 팔을 쭉 내뻗어 손가락까지 펼쳐보아도 닿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짙은 곤빛 하늘도, 먹을 잔뜩 머금은 듯 컴컴한 하늘도 늘 멀게만 느껴졌다.
꿈속에서의 하늘은 현실과 달리 친근하고 포근했다. 알라딘과 재스민이 마법 양탄자를 타고 날아다니던 밤하늘 마냥 놀라운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는 무대였다.
현실이라 일컫는 이곳에서는 하늘과 우리를 갈라놓으려는 힘, 중력이 항상 존재한다. 언제나 그렇듯 닿을 수 없고 바라볼 도리뿐인 존재를 상대로 가능한 일은 그 꿈을 꾸는 것뿐이다.
그렇게 항상 하늘을 꿈꿨다.
꿈에서 깨어난다. 어둠이 가장 짙게 내리깔리는 새벽이 바로 첫 동이 트기 시작하는 순간이라는 말을 수천, 수만 번 되새겼다. '지금이 가장 깊은 새벽이다', '이제 곧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겠지'. 그리 중얼거렸다. 하늘은 마치 희망을 그리는 스크린처럼 매일 밝아올랐다. 가장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도 누군가는 가장 행복한 순간을 누렸을 것이나 삶은 소망하는 바대로 매끄러이 흐르지는 않았다.
해가 지면 생각이 많아지고, 해가 뜨면 활동을 시작하고, 비가 오면 감성적으로 변하고, 맑은 날에는 유쾌할 수 있는, 세상이 그렇게 단순한 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나서서 고개를 들었을 때, 같은 모습의 하늘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 마주하는 하늘과 어제 본 하늘이 같은 것이라 생각하고 만다. 어제의 그 납작한 구름도, 오른편에 떠 있던 태양도 오늘은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실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펼쳐진 하늘에도, 별다른 다른 점을 찾아내지 못하는 눈에도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다만 하늘을 조금 더 의미 있는 존재로, 아름다운 세상의 전제로 여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가장 감동적인 하늘의 모습이 일출이라면 가장 따뜻하고 여운 깊은 하늘의 모습은 일몰이다. 어둠을 뚫고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과는 달리 마지막 광휘를 넘실거리며 어둠이 찾아오기 직전의 찰나를 절정의 색으로 물들이는 까닭이다. 세상에 태어나 한 번쯤 세상을 황혼처럼 자신의 색으로 물들일 수 있다면, 삶의 마지막 순간 우리는 충분했다고 돌이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땅에 얽혀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늘은 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늘 원하는 대로 옷을 갈아입으며 아무런 훼방없는 삶을 만끽한다는 생각에 어쩐지 조금은 분한 마음도 든다. 한 번쯤은 하늘을 스스로의 색으로 물들여보고 싶다는 꿈을 꾼다.
그저 해가 뜨고 지는 모습만으로도 매번 겸허를 배우고 경외심을 품었다. 마침 비행기에서 내다 본 하늘이 떠올랐다. 자연의 거대함에 대한 탄성이나 자신의 작음에 대한 반성도 좋을 것이나, 자신이 알지 못했던 세계가 항상 고공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땅 위에서는 그토록 거대해 보이던 건물과 자연경관들이 하늘 조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웅덩이에서 갓 퍼올린 진흙으로 만든 집과 장난감처럼 보인다. 우리가 개미들을 바라보며 갖는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1만 피트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이 세상에는 서로 간의 높이 차이도, 구별도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대체 무엇을 위해 우리는 조금 더 높아지려 발버둥 치는 것일까'
하늘에는 '자유'가 있다. 땅에서처럼 서로가 서로를 막아서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모든 대자연이 그렇듯 하늘이 선사하는 이 자유는 두 얼굴을 가진다. 자신의 품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저 바라만 볼 뿐, 하늘은 결코 개입하는 법이 없다. 하늘은 우리에게 자유라는 가치와 함께 자신에게 지워진 운명의 무게는 직접 짊어지라는 '책임'을 함께 지운다. 진정한 자유에는 항상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언젠가부터 '하늘을 날고 싶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한 공상 자체를 사치로 여기기 시작하는 순간이 곧 유년시절의 마침표인지도 모른다.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번 꿈꾸고 싶다.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서 하늘을 날아오르는 꿈을,
다시 한 번만.
삽화 : Cover . Melissa McKinnon 作 / ⅰ. Francis McCrory 作 / ⅱ. Dan Miller 作 / ⅲ. Joel Rea 作 / ⅳ. Brian Slawson 作 / ⅴ. Vladimir Kush / ⅵ. Marie Françoise Pein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