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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Jul 14. 2015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Ⅰ

 '순수'


새벽 세 시,


 긴 시간 작업에 지쳐 차가운 보리차라도 한 모금 들이켜야겠다는 생각으로 방을 나선다. 문을 열자마자 무언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제노다. "어? 내가 아까 너 안 묶어놨었니?!" 얼마 전 외출한 사이에 어금니로 목줄을 끊어내고 자유를 만끽하던 모습이 생각나 우선 목줄과 리드줄부터 확인한다. 모두 멀쩡하다. 돌이켜보니 작업실로 향하기 전, 목줄을 착용하지 않은 모습이 더 야생 허스키에 가까운 미모를 발산한다면서 전부 풀어뒀던 기억이 난다. 선풍기 앞에서 곤히 자다가 갑자기 아빠가 방에서 나오니 쪼르르 달려와 예뻐해 달라며 비벼댄 것이다.

새벽 3시, 냉장고를 향하다가 마주친 제노 군

 티 없이 순수한 눈망울에 감격한 나는 제노가 좋아하는 얼음 조각을 하나 꺼내 주고 만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들이킨 보리차는 지나치게 서늘해 오히려 속이 메스껍다. 아드득 오도독 얼음 조각을 깨물어 먹는 소리가 참 앙증맞다. 오밤중에 저렇게 행복하게 얼음을 먹을 수 있다니 그 비위가 부럽기도 하다. 목줄과 리드줄을 방문고리에 걸어 본격적으로 잘 시간이라는 메시지를 제노에게 전한다.



 어릴 적부터 잠자던 곳에 묶여 있어야 안심하고 깊이 잠드는 버릇이 생겼다. 때문에 어느 정도 성장한 뒤에도 잠자는 장소와 시간 만큼은 그대로 지켜주고 있다. 풀어놓고 최대한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이 항상 모든 상황에 있어 최선책은 아니다. 보리차로 뒤집어진 속 때문에 더 이상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기진맥진하게 깜빡이는 커서를 뒤로 하고 침실로 향한다.


 제노는 항상 침실 앞에서 잔다. 집에 온 첫날부터 그랬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집에 와서 낯설고 겁이 났을 텐데도, 혼자 있는 게 너무 무섭고 부담됐는지 우리가 있는 방 근처로 최대한 다가와서 잠이 들곤 했다.

집에 온 첫 날, 펜스를 설치하고 재웠는데 새벽에 깨어 내다보니 힘이 워낙 좋아 펜스를 끌고 엄마와 아빠가 보이는 위치까지 와서 잠든 아가 제노 (펜스는 바로 다음날 처분했다)

 편안한 자세로 사지를 쭉 뻗고 누워 눈동자만 돌려 나를 올려다보는 제노를 몇 차례 쓰다듬어주고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금방 잠이 들 것 같았는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밖에서 제노의 가쁜 숨소리가 들린다. 갓 잠들었을 때의 숨소리다.


 몸을 돌려 누워 잠을 청하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저 녀석 만큼 순수했던 시절은 언제였지?'


순수하다.


 시베리안 허스키에 대해서는 단 몇 개의 단어만 가지고도 묘사가 가능하다. 그만큼 복잡하고 꼬인 부분이 없다.  그중 가장 앞에 와야 할 두 표현 중 하나가 바로 '순수함'이다. 대부분의 사랑스러운 반려견들이 공통적으로 순수하게 즐거워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표출한다는 공통점을 공유한다. 허나 허스키라는 견종이 사랑과 애정을 듬뿍 받았을 때 도달하는 순수함의 결정체는 가히 설명할 방도가 없을 정도이다. 이제껏 여러 견종을 경험해 보았지만(나중에 소개할 기회가 되면 인연이 닿았던 다른 반려견들에 대해서도 소개하겠다) 허스키는 분명 무언가가 다르다.


 그들의 사고 방식, 즉 생각을 하는 패턴이 다소 급진적이고 과격한 탓에 처음에는 지극히 본능으로만 움직이는, 그리 총명하지는 않은 견종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예를 들어 테이블과 같은 장애물을 가운데에 둔 채로 "이리와!"라고 부르면 내가 아는 대부분의 개는 테이블을 돌아서 오거나 작은 아이들은 그 아래를 통과해서 왔다.


제노는 테이블을 뛰어서 넘어왔다.


 항상 그랬다. 대각선 지점에서 불렀을 때 절대로 통과할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ㄱ'자나 'ㄴ'자를 그리면서 오는 법이 없었다. 무조건 직진으로 눈에 보이는 최단 거리를 돌파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머리가 나빠서 그런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도 품고 갈 우리 식구라고 어여삐 여겼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 녀석이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났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향함에 있어 돌아서 가는 루트가, 간접적인 표현이 그저 내키지 않았던 것뿐이다.


 간식이나 밥을 향한, 놀이와 주인을 향한 무한한 애정 표현을 바라보고 있자면 나 자신이 저렇게 무언가에 순수하게 열정적이었던 때가 언제였는지 궁금해진다. 연어로 만든 육포나 사료, 봉제 장난감은 우리에게 하찮지만 제노에게 있어선 인생을 '살맛 나게 해 주는' 촉매제이다. 어차피 그 누구도 시베리안 허스키가 인간 세계에서 통용되는 이념이나 신념, 어떤 고고한 이상이나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밥 잘 먹고, 배변 잘 하고, 장난감 잘 갖고 놀고, 신나게 뛰놀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베리안 허스키와 다른 존재다. 밥과 간식과 장난감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의 결핍이 있고 욕구가 있고 열망이 있다. 문제는 현재 이 세상이, 시대가, 사회가 그 순수한 결핍과 욕구와 욕망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편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모든 것을 사회적인 구조나 모순 탓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야 참 편할 것이다. 나는 성인이 된 이래로, 시베리안 허스키 한 마리가 주인과 밥을 향하는 열정 만큼 순수하게 무언가를 추구하거나 그러한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사람을 주위에서 본 적이 없다. 물론 위인전이나 매스미디어에 소개되는 여러 명사들은 그러한 열정적인 삶의 롤 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 허나 주어진 현실을 휙 둘러보면 곧 깨닫게 된다. '그러한 캐릭터들은 내가 살아가는 세계와는 다른 은하계의 존재들과 딱히 다를 바 없구나, '하고.


 나는 제노의 생존을 책임지는 주인이자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이지만 제노를 동경한다. 구관조 모양 장난감에 대한 열정을 동경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그렇게 순수한 형태로 열망한다는 점을 동경한다. 계략을 쓰지 않고 머리를 굴리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고 '내가 저것을 원한다'고  스스럼없이 표현할 수 있음을 동경한다. 그리고 추구의 대상이 결코 바뀌지 않는, 그 본질적인 순수함을 동경한다.


 '싫은 건 싫다. 좋은 건 좋다. 내가 좋으니까 표현한다. 내가 싫으니까 표현한다.' 제노의 사고방식이다. 물론 이러한 표현들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강박에 시달린다. '모두와 잘 지내야 한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다'. 그 과정에서 싫은 것을 싫다고 표현할 기회를, 좋은 것을 좋다고 표현할 기회를 잃거나 포기하고 만다. 많은 이에게 사랑을 받은 방법은 예부터 단 두  가지뿐이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죽이고 다른 이들의 구미에 맞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리스크는 대부분의 경우 삶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거의 사라져 버린다는 데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살려놓고 보니 다른 이들이 좋아해주더라 하는 경우(리스크는 완전히 표현된 자신을 타인들이 싫어할 수도 있다는 점?). 다행히 제노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표현하는 천덕꾸러기였음에도 많은 이들이 사랑을 베풀어주는 행운을 누렸다.




 어쩌면 순수함이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직시할 때, 혹은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른 모든 가능성을 고려치 않고(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자 본성인지도 모른다. 일종의 광신이며 무지라 불릴 여지도 다소 있지만 여전히 돈 키호테는 사랑받고 있지 않은가.  


이 길고 지루한 글에 지친 분들이 귀여운 강아지의 눈빛으로 조금이나마 마음을 푸실 수 있었기를 빌며, 항상 지니고 다니는 돈 키호테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매조지하고자 한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따자."


- 미겔 데 세르반테스 作

  소설 '돈 키호테(Don Quixote)'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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