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ssian Jul 16. 2015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Ⅱ

 '고집'


 '고집이 세다'는 표현, 그리고 '고집이 있다'는 표현이 있다. 개인이 어떤 문제에 대해 결정하거나 판단함에 있어 상당한 무게감으로 자신의 신념, 혹은 기준을 고수할 경우 흔히 위의 두 표현을 사용한다. 얼핏 듣기에는 같은 말처럼 들릴 수 있으나 각 표현이 쓰이는 상황은 확연히 다르다. 서로 다른 음절이 담고 있는 뉘앙스, 즉 함의가 한쪽에 대해서는 부정의, 다른 한쪽에 대해서는 긍정의 시선을 담고 있는 까닭이다. 이는 소통의 가능성 여부를 시사하기도 한다.


 딱딱하고 메마른 어조로 글의 서두를 굳혀버려 안타깝지만 시베리안 허스키가 지닌 고집의 미묘함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개념적인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아침, 제노의 고집스런 눈빛 - 2.5 개월 무렵

 시베리안 허스키는 기본적으로 여타 견종들에 비해 천성적인 야생 본능이 매우 강한 편이다. 척박한 툰드라 벌판에서 억척스러운 삶을 이어갔던 조상의 기질을 지닌 탓에(물론 아주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허스키라는 견종 자체가 시베리아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추크치 족에 의해 사역견으로 교배된 품종이므로 사실상 대부분의 허스키는 인간의 관리를 받으며 종족을 보전해 왔다.)  먹이, 즉 식사에 대한 탐욕과 집착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또한 동일 중량 기준으로(pound to pound) 계산했을 때 사물을 앞으로 끌고 가는 힘이 가장 센 견종, 그리고 동일한 양의 식량으로 가장 먼 거리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견종 1 위로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다. 영화 '에이트 빌로우'나 잭 런던의 소설 '늑대개(원제 White Fang)'에 등장하는 썰매견의 명성이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이번 글에서 시베리안 허스키의 고집을 '식욕'과 '끌고 질주하는 본능(그냥 질주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뭔가 무거운 것을 뒤에 달아놓지 않으면 뛰다가 이륙할 것 같다.)'으로 집약해 제노의 사례에 적용해보려 한다.



제노의 식사 시간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매 순간이 전투였고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밥그릇에 사료를 담아 제노 앞에 놓아 주었을 때,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과격한 식사? 급하게 먹다가 급체? 밥그릇을 뒤집는다?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제노를 집에 처음 데려온 사흘간 급여 시간마다 목격한 광경은 바로 '다이빙'이었다.  온몸으로, 온 주둥이로 사료 그릇의 정 중앙에 뛰어들었다. 눈 앞의 먹이를 다른 존재로부터 지키는 동시에 먹고자 함, 그리고 먹는 동시에 온몸을 던져 지키고자 함이 뒤섞인 결과였다. 제노에게 밥을 줘야 한다는 사실이, 식사 시간이 다가온다는 사실이 스트레스였고 일종의 공포였다. 예전에 키웠던 도베르만도 꽤나 테이블 매너가 없었지만 제노에 비하면 감히 신사적인 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뭐 드세요?


 심사숙고, 그리고 허스키에 대한 여러 연구 및 조사 끝에 더 이상 주도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행히 아직 제노는 덩치가 작고 어린 아가였다. 그리고 나 역시 어떤 상황이 발생해도 제노를 제압하고 굴복시킬 수 있는 의지와 완력을 가진 성인 남성이었다. 그리하여 제노를 데려오고 나흘 째 되는 날부터 나와 제노 사이의 지긋지긋하고 처절한 기싸움이 시작되었다.


 사료 붓는 장면 보여주고 진정할 때까지 절대로 밥 안 주기, 주고 나서 바로 달려들지 못하게 억제하기, 먹는 도중에 사료 그릇 빼앗기, 먹는 도중에 명령에 따라 자발적으로 식사 중단하게 하기, 식사 중에 만져도 그르렁대지 못하게 하기, 사료 그릇에 다이빙하지 않고 천천히 접근하게 만들기, 사료 준비하는 동안 얌전하게 기다리도록 만들기 - 이는 그날부터 약 4개월간 매 식사 시간에 몇몇 항목을 섞어가며 엄격하게 훈련시킨 내용이다. 이는 따로 진행해야 했던 '배변', '물 마시기', '산책', '놀이', '기본 복종 훈련' 등을 모두 제외한 것으로, 오로지 '보통 강아지들처럼 식사하도록' 만들기 위해 기울여야 했던 노력이었다. 직접 키운 경험이 있는 도베르만, 몰티즈, 비숑프리제, 푸들 등의 견종이 제대로 '평범한 식사'를 하기까지는 제노에게 들어간 노력의 10분의 1도 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제노를 포함한 모두가 만족할 만한 식사 예절을 확립할 수 있었다. "배고프지?" 혹은 "맘마 먹자!"는 말에 제노는 날아오를 듯 기뻐하며 빙빙 돈다.(덩치가 너무 커서 때로는 제노의 환희가 위협적이지만 우리가 억제시켜야 할 본능은 아닌 듯하여 양보하기로..) 밥그릇을 꺼내 사료를 담는 동안 제노는 얌전히 기다린다. 기다린다기 보다는 기다리려고 애쓴다는 표현이 알맞을 것 같다.(이는 본능을 억제하기로 결심한 제노의 양보다) 사료 그릇을 제노 앞에 두면 제노는 얌전히 앉아서 아빠나 엄마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먹어!"라는 구령이 떨어지기 전에는 이제 절대 사료에 입을 대지 않는다. 너무 배가 고파서 침을 바닥에 흥건하게 흘리는 한이 있어도. 대신 우리는 제노가 잘 기다리는 모습이 보이면 최대한 신속하게 먹으라는 신호를 준다. 또한 밥을 먹는 동안은 항상 지켜봐주고 먹는 음식을 빼앗거나 식사를 방해하지 않는다.


 그렇게 평화롭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제노는 더 이상 사료에 대해 과도한 집착하거나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게 되었다. 사실 훈련이 시작된 첫날부터 제노는 자기가 어떻게 행동하면 안 되는지 알고 있었다. 다만 허스키에 내재된 본능적인 고집의 강도가 남들보다 훨씬 강해 곧바로 자신의 본능을 꺾는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던 것 뿐이다. 요즘도 너무 배가 고플 때에는 식사 전 앉으라는 요구에 매우 느린 동작으로 앉는다. 어찌나 앉는 동작이 느린지 5초가 넘게 걸릴 정도다.


밥그릇 앞에 느리게 앉는 이 사소한 동작에 변화한 제노 고집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밥그릇에 다이빙을 일삼던 '고집 센' 제노는 앉으라는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최대한 느린 동작으로 항거를 하는, '고집 있는' 제노로 거듭난 것이다.



 

 식사와 마찬가지로 산책에서도 제노는 일관적이었다. 어리고 호기심이 많은 남아라는 점은 전부 제쳐두고서라도 일단 물리적인 힘이 했다. 4개월 하고도 반쯤 지나자 일반 여성 혼자서는 제대로 통제하거나 끌고 다니기 어려운 정도의 출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과장이 아니라 국민 애완견 리드줄이라 불리는 산책용 줄을 순수한 힘으로 두 개나 끊었다. 끈이 끊어지는 게 아니라 고리에 달린 스프링이 퍽 하고 튕겨져 나올 정도로 순간적인 가속력이 대단했다. (예전에 기르던 도베르만 핀셔, 버디는 쇠사슬도 끊어버린 적이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1년 이상 자라 성견이 된 다음의 일이었다.)

한적한 지하주차장을 찾아 한창 '직진하기'를 연습중인 제노(눈빛에 서린 서슬 퍼런 고집에 주목)


 허스키의 산책 훈련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관심사가 있어도 결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직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시키는 부분이다. 여기서 보통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는 통제하는 데 필요한 완력이다. 위에서도 지속적으로 언급한 바 있어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약 6개월령이 넘어갈 무렵, 한 친구(성인 남자)가 카페 의자에 앉아 리드줄을 넘겨받았다가 의자에 앉은 채로 끌려간 적이 있었다. 게다가 산책 도중 비둘기를 발견했을 때 순간적으로 튀어나가는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8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나 역시 순간적으로 튀어나가는 제노에 휘청 하면서 끌려갈 때가 있을 정도다. (요즘은 러닝 산책을 자주 하는데 전력질주를 하는 척 하면 제노도 급가속을 시작한다. 이 때 속도를 늦추고 전력 질주하는 제노가 이끄는 줄에 끌려가듯 몸을 맡기면 참 편하게, 힘들이지 않고 빨리 이동을 할 수 있다. 좀 치사한 느낌이 들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서울 한복판에서 썰매견의 진가를 발휘할 일이 없다!)


 산책 훈련에서 가장 어려운 두 번째 요소는 강아지가 보고 싶은 것을 보게 해 주고, 냄새 맡고 싶은 것을 맡게 해주고 싶다는 측은지심이다. 이 마음에 이끌려 처음 외출한 강아지에게 두어 번 방임을 허락하는 분들은 대부분의 경우 평생 반려견에게 끌려다니는 모양새로 산책을 하게 된다. 허스키의 경우, 아직 어린 허스키가 얼마나 호기심이 많겠냐고 안타까워하는 마음과 그 호기심을 뒷받침하는  완력이 합쳐   인간 썰매가 탄생할 가능성이 높다.

비둘기를 발견한 제노, 그리고 팽팽해진 목줄

 우리는 처음부터 일반적인 산책 기준보다 더 강하게 잡아끌고 통제하면서 직진 및 주인의 진행 방향을 따라오도록 훈련시켰다. 직경 8cm짜리 쇠고리가 달린, 두께 3cm의 산책용 줄을 구해 손에 단단히 말아쥔 채 제노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산책 훈련을 무작정 일 주일 가량, 아주 엄격하게 진행했다. 문제는 내쪽에서 발생했다. 어깨와 팔 근육이 일 주일간 제노의 완력에 시달려 너덜너덜해졌고, 산책용 줄을 말아쥔 손의 손날 쪽 뼈가 지속적으로 심한 압력을 받은 탓인지 염좌가 생겨 주먹을 쥐었다 펴기도 힘들 정도의 상태로 접어들었다.  5개월짜리 강아지의 산책용 줄을 제대로 쥘 수가 없어 산책을 나갈 수 없는 황당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물론 손을 회복하고 난 뒤부터는 제노도 산책 방식에 점차 적응하게 되어 이젠 함께 몇 킬로씩 달리고 제노의 주 관심사인 비둘기와 까치를 쫓아다니지만 식사 습관과 마찬가지로 '고집 센' 썰매견을 '고집 있는' 썰매견으로 바꾸는 데 소모한 칼로리는 도저히 측정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허스키가 가진 특유의 순수하면서도 지독한 고집은 동반자에게 있어 매력이자 마력이자 난관이다. 그와 비슷한 고집을 지닌 인간이 있다면 대단한 애증의 존재이지 않을까.

 


 고집이 지나쳐 융통성이 부족한 사람은 사회에서 만나도 불편하다. 고집이 너무 없어서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사람은 따분하고 흥미가 가지 않는다. 고집은 곧 인간 정체성의 발현이며 자아를 확립해가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인 것이다.


 자기 자신이 고집이 '센' 사람인지, 아니면 '있는' 사람인지를 파악하고 사회에서 필요한, 가정에서 필요한, 자기 내면에서 각각 필요한 고집의 적당선을 찾아낸다면. 우리는 사회에서, 가정에서, 내면에서 보다 조화롭고 평화로운 삶을 이룩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의 고집 센 제노와, 지금의 고집 있는 제노와, 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 다음 글 예고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Ⅲ : '역사'

이전 01화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