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ssian Jul 19. 2015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Ⅲ

'역사'

 수레바퀴가 지나가며 흙 위에 남긴 자국을 두고 우리는 '역사'라 말한다. 그와 같은 역사의 주체가 되는 수레바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어렴풋하게나마 '어느 한 시대', 혹은 '어떤 의지'와 같은 무게감 있는 단어들이 흙 위에 흔적을 남길 만큼 중량감 있는 수레를 구성하는 것 아닐까, 감히 상상해본다. 그러한 탓에 일반적으로 어지간한 위인이 아니고서는 하나의 인격, 개인적이고 개체적인 삶이 '역사'의 한 축으로 각인되는 일은 흔치 않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정의란 참으로 어려운 법이다. 허나 지극히 인간적이고 시공간에 속박된 관점에서 보자면 속된 표현으로, '탄생부터 지금까지 존재했던 선택과 경험의 총합'이라 정의할 수 있다. 물론 미래에 펼쳐질 잠재적 씨앗은 잠시 배제해 둔다면.


제노 셀카


 지난 회에 작성한 제노의 '고집' 이야기가 어떠한 계기로 많은 분들께 알려지는 행운을 얻었다. 참 기뻤다. 내가 작성한 글이 많은 조회를 기록했거나 주요 포털의 메인에서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그토록 아끼고 애정을 쏟고 사랑하는 제노의 본질과 그 삶이 이 세상의 어딘가에, 이 흘러가는 시간의 어딘가에 깊이 기록되어 한 조각의 '역사'가 되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기 때문이다. 길어야 15년 정도밖에 살 수 없는 짧은 생명이 유구한 시간 속에 작게나마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은 그 생명을 품고 책임지는 내게 있어 지극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제노 일생의 동반자이자 보호자로서, 앞으로 펼쳐질 제노의 삶을 주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하기 이전에 우선 이때까지 이 녀석이 어떤 모습과 과정을 거쳐가며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한 차례 되짚으며 소개하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2014년 12월 14일, 제노와의 역사적인 첫 만남

 ⅰ 입양기


 세상 모든 역사적인 사건들이 그렇듯 제노와 우리는 우연히 만났다(개인적으로 우연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가 강아지 치고는 짙고 푸른 눈동자에 약간은 슬픈 듯한 색이 어려 있었다. 일단 사랑스러운 외모에 홀라당 매료되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애써도 부정할 도리가 없다. 처음 시야에 제노가 들어온 순간 들었던 생각은, '어떻게 이 세상에 이렇게 예쁜 생명체가 다  있지?!'였다. 물론 제노를 데려오기로 결정하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의 숙고와 허스키에 대한 조사 및 연구가 소요되었다. 국내에는 허스키 종에 관한 소개 책자가 몇 없었다. 인터넷상에 떠도는 정보만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족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아마존 킨들을 이용해 시베리안 허스키라는 견종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전자책을 몇 권 구입해 사나흘간 독파했다. 다소 우려되는 내용도, 안심되는 내용도 있었다.


 입양을 완전히 결심한 순간은 조사나 연구, 첫날 찍은 사진을 돌이켜보면서 감격한 순간이 아니었다. 제노를 한 번 더, 제대로 보고 싶었다. 샵이 오픈하는 시간에 맞추어 우리는 제노를 찾아갔다. 마침 아가들의 아침 식사 시간이어서 모든 강아지들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그런데 그 와중에 조용히 앉아 우리를 주시하는 녀석이 있었다. 제노였다. 나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 표정과 자세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장면은 아래의 사진에도 담아두었다.

제노를 데려오기로 결정한 날(북새통 한가운데에서 제노는 저렇게 앉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 3.5개월 무렵의 제노 / 본격적인 산책에 적응하기 시작한 6개월 무렵의 제노

ⅱ 적응기


 새로운 가정 환경에 발을 들인 제노에겐 여러 필수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배변 훈련, 식사 훈련, 놀이 적응, 백신 접종 등 시간과 서로의 인내가 필요한 시기였다.


 다행히 배변 훈련은 두 달만에 깔끔하게 마무리되어 무슨 일이 있어도 배변판에 가서 소변과 대변을 가리기 시작했다. 식사 도중에도 배변판에 가서 용무를 마친 다음 밥그릇으로 돌아와 식사를 재개할 정도였다. 특이한 점은 너무나 철저하게 배변을 가리기 시작해서 외출을 하면 용변을 참았다가 집에 돌아오면 배변판으로 달려가 해결한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산책을 하는 한두 시간 정도는 건강상 조금 참아도 크게 무리가 없는 선이어서 이러한 배변 습관은 주로 실내 생활을 하는 제노와 우리에게 오히려 편리했다. (배변 습관보다도 더 큰 문제는 몸집이 큰 제노에게 알맞은 배변판을 구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장비들에 관한 내용은 추후에 따로 다루도록 하겠다)


  워낙에 활달한 성격이라 놀이도 딱히 적응이 필요 없었다. 다만 간식 문제는 조금 민감하게 접근해야 했다. 제노의 식탐이 문제가 아니라 선천적으로 소화 능력이 약한 시베리안 허스키라는 견종의 문제였다. 나중에야 전문 책자를 뒤져서 알게 된 내용이지만 허스키에게는 우유 성분이나 가죽 성분으로 만들어진 개껌이 상당히 유해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즉각 급여하던 간식 종류를 모두 끊었다. 또한 제노가 설사나 구토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개껌류, 육포류, 가공간식류 전부를 배제해야 했다. 요즘은 고온 건조한 생선육 성분의 간식만을 섭취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물 병원이나 펫샵, 그루밍 샵의 조언을 무조건적으로 따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부분의 개나 고양이에게 적용되는 내용이 나의 반려견에 있어서는 예외일 수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스스로 자신의 애완동물의 '종'을 다루는 전문 서적을 읽어보라고 권유한다.


 이 적응기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바로 '이갈이'였다. 덕분에 우리는 적당한 시기를 보아 두 개의 방문 몰딩을 전부 새것으로 교체해야 하고, 벽 한 면을 완전히 다시 도배해야 한다. 인내심이 몇 차례나 한계에 도달하고 과연 제노를 데려온 것이 올바른 결정이었나 끊임없이 고민하던 시기였다. 제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아도 모든 유치가 빠지고 영구치가 나는데 가렵지 않을 리가 없었다. 실제로 수많은 중대형견들이 바로 이 시기에 파양을 당한다. 어릴 적 귀엽고 자그마한 모습에 반해 데려왔다가 4~7개월 사이에 이갈이와 함께 겪는, 이른바 '개춘기'라 불리는 시기를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다. 견주는 무책임하다는 비난, 다소의 가책과 후회만 겪으면 된다. 허나 반려견에게 있어 이러한 파양은 인생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안타깝게도 이 무렵 파양된 중대형견 아이들은 그 크기와 관리의 어려움 탓에 유기견 센터에서도 쉽게 새로운 가정을 찾지 못해 안락사를 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실제로 가끔 산책을 하다가 마주치는 골든 리트리버 두 마리가 있는데 모두 유기견이었으며, 그중 한 마리는 안락사를 닷새 남겨둔 상태에서 데려왔다고 했다) 어떤 경로로 유입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길 잃은 허스키나 리트리버 상당수가 보신탕집에서 최후를 맞이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정신이 아득할 정도였다.


 허나 제노의 개춘기는 나로서도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혼을 내도, 대용품인 장난감이나 껌을 주어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해결법은 간단했다. 제노가 도저히 본능적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면, 우리가 포기하면 된다. 우리는 방문 한 두개, 몰딩 한두 세트, 벽지 한두 롤 정도는 제노에게 내주기로 마음먹었다. 분명 제노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포기한 본능과 욕구가 있을 텐데 우리 역시 제노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감내하고 희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글은 참 평온하게 상황을 받아들인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화산이 최소 다섯 차례는 폭발했었다....)

산책, 냉돌침대, 그리고 실신

이갈이가 완전히 끝난 제노는 더 이상 몰딩이나 방문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냥 선풍기만 틀어주면 천사처럼 몇 시간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쿨쿨 잔다.


이 과정은 새로운 환경에 놓인 강아지와 가족이 서로에 대한 유대와 신뢰의 기초를 쌓아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서로에 대한 포용력과 이해력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때랄까...?


 


ⅲ 산책기


 허스키는 압도적인 운동량을 자랑하는 견종이다. 과장이 아니다. 심각할 정도로 많은 운동량이 필요하다. 지금 와 허스키를 데려오는 일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가장 먼저 묻고 싶은 말은 "얼마나 운동을  함께해줄 수 있으시죠?"다. 큰 개 감당하시겠어요, 밥 많이 먹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배변량이 상상초월이에요, 미주알고주알 다 필요 없다. 허스키의 가장 큰 행복은, 아니, 행복의 7할은 운동이자 활동이다.


동갑내기 래브라도 밀로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제노


 제노가 함께 가장 잘 노는 '말리'라는 불도그가 있다. 둘이 만나면 최소 30분은 심하게 뒤엉켜서 논다. 그 뒤에 말리는 지쳐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제노는 그제야 산책 시작이다. 보통 강아지들은 밖에서 몇 분 정도 산책을 하면 충분히 운동이 되어 지친다는 기준이 있다. 견주들은 보통 자기 반려견의 적정 산책 시간을 인지하고 있다. 내 경우 비숑은 15분이었고 도베르만은 35분 정도였다. 허나 허스키의 산책은 시간 단위로 측정해서는 안 된다. 걷기만으로 제노를 지치게 하는 데에는 두 시간 정도가 걸린다. 두 시간은 도시인의 삶에서 비현실적인 단위다. 그래서 나는 거리 단위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제노는 아직 어리고 체력이 약해(?) 하루 4~5킬로미터 정도를 산책하면 녹초가 된다.  그중 2~3킬로는 걷기가 아닌 제법 빠른 러닝(러닝머신 속도로 10~11km/h)이다. 그렇게 산책을 하고 개는 헥헥범벅, 사람은 땀범벅이 되어 돌아와야 행복한 허스키의 삶이 보장된다.


관점을 다르게 두어 운동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허스키는 두말할 나위 없는 최고의 운동 파트너다. 나는 아직도 러닝에서 9개월밖에 안 된 경도 비만 꼬맹이 제노를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지구력에서도, 단거리 경주에서도. (한 번 이겨보겠다고 이를 갈면서 운동을 하게 되었다)


허스키 가이드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을 소개하고자 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맘껏 들판을 질주하는 제노. 얼마나 행복한 지 얼굴에 다 써 있다.


'가장 불행한 허스키는 마당에 혼자 방치된 허스키와 아무도 함께 운동을 해주지 않는 허스키다.'


'허스키는 밥을 주거나 혼내는 사람을 주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함께 산책하고 운동하는 사람을 자신의 주인으로 여긴다.'





ⅳ 아무래도 상관없기(귀차니즘기)-현재



 현재 단계를 말한다. 이는 모든 허스키에 적용되는 것이 아닌 제노만의 독특한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제노는 참 무던하고 예민하지 않은 성격이다. 세상에 싫은 게 없다. 그냥 다 좋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자기를 예뻐하는 말 한 마디만 해도 따라서 내리려고 한다. 새벽 시간 열어놓은 창밖에서 폭주하는 오토바이나 자동차 소리가 들려도, 소방차들이 줄지어 출동해도, 윗집에서 드릴질을 해도 아무 관심이 없다. 요즘은 외출하고 돌아와도 "여, 왔네?" 하는 느낌으로 쿨하게 고개를 들어 쳐다본 다음, 서너 차례 기지개를 켜고 본격적으로 놀아달라고 돌진해온다.

일하는 아빠 옆에 와서 곤히 잠든 제노. 저 정도면 평범한 자세다.


 지금 이 글을 작성하는 중에도 제노는 책상 바로 옆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자고 있다. 밤새 일을 할 때에는 꼭 작업실로 쪼르르 쫓아와 내가 일하고 있는 책상 아래에서 잠든다. 바퀴가 달린 의자 프레임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어 넣고 곤히 자는 바람에 한참을 자세 한 번 못 바꾸고 일해야 했던 적도 많다. (다행히 요즘은 하도 머리가 커져서 의자 밑에 안 들어간다)


 나조차도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제노는 요즘 식사마저도 느긋해졌다. 사료 소리만 들으면 안절부절 못하면서 뛰어오르던 녀석이 이젠 누워서 밥그릇이 준비되기를 기다린다. 혹여나 누가 빼앗을까 걸신 들린 듯 먹어치우던 녀석이 요즘은 먹다가 소변도 보러 가고 대변도 보러 다녀온다. 식사 중에 만지면 으르렁거리던 녀석이 이젠 식사를 멈추고 만지는 손을 핥는다. 놀아달라고. 더 만져달라고.









지금껏 여러 차례 노도의 시기가 있었지만, 나는 요즘의 제노가 참 좋다.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제외한 나머지에는 무심할 수 있는 배짱 좋은 성정이 좋다.

사나운 개건 짖어대는 개건 처음 보는 동물이건, 끽소리 내지 않고 우선 다가가 보는 호기심이 좋다.

좋아하는 것을 보았을 때 얼굴에 드러난 가식 없는, 정말 좋아하는 표정이 좋다.

이상한 자세로, 혹은 기괴한 자세로 잠자면서 마치 웃는 것 같은 얼굴 표정이 좋다.

방문을 닫고 들어가면 한참 동안 문 앞에서 기다리면서 낑낑대는 것도,  일을 마치고 문을 열면 비스듬히 문에 기대어 누워있다가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눈빛이 좋다.

이렇게 정이 많이 들었는데 나중에 죽으면 그 상실감을 어쩌나, 울적한 마음으로 어루만져줄 때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표정으로 손을 핥는 그 따뜻함이 좋다.



아빠 품에 안겨서, 씨익-




- 다음 글 예고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Ⅳ : '자세'

이전 02화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