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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ssian Nov 04. 2015

은빛 시베리안 허스키 XIV

'생일'

 

 지난 2015년 10월 13일은 우리 흰 멧돼지의 첫돌이었다. 워낙에 덩어리감과 털감(?)이 풍만하다 보니 사실 세상에 태어난지 365일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첫돌을 맞이한 사람 아가는 충분한 의사표현이나 홀로 제대로 된 걸음걸이를 익히기조차 어렵지만 반려견의 경우 한 살이면 말 그대로 '다 컸다'는 표현이 들어맞는다.


 약 1년 전 우리 가족이 된 제노. 평소엔 엄격한 식단과 영양 조절을 엄수하는 아빠지만(허스키의 예민하고 약한 소화기관 탓에 어쩔 수가 없다...) 생일만큼은 제노의 한껏 신나서 고양된 모습과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날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비눗방울이랑 제노의 눈, 어느 쪽이 더 초롱초롱?

 

 - 아빠의 호기심, 비눗방울 총...


 강아지의 생일파티라니... 솔직히 말해 예전에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남들 일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막상 내 자식이라는 생각을 하니 도저히 넘길 수가 없었다(가능하다면 가족관계증명원에도 등재시키고 싶었지만 반려견 등록 정도로 타협했다).


 생일 파티 준비를 위해 고깔, 생일초, 생일선물용 간식 등을 사러 나선 나는 의외의 물건에 마음이 향해버렸다. 바로 비눗방울 총이었다.


 내가 어렸을 적 문방구에서 파는 비눗방울 장난감은 모두 작은 원형 플라스틱 막대를 잡고 '후우~'하고 조심스럽게 불어서 방울을 날려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처음엔 물총이냐고 물었다가 아이들 장난감 물정 모르는 젊은이가 되어버렸다. 마치 탄창처럼 총에 비눗물통을 돌려 끼우고 총을 발사하면 요란한 음악과 조명이 흐르면서 헤어드라이기처럼 바람과 함께 비눗방울이 끝없이 분사되는 것이었다.


신세계였다. 분명 제노도 좋아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제노는 덩치와 다르게 겁이 정말 많다. 처음 한 10분은 비눗방울을 피해 도망다니더니,  그다음 10분간은 떠다니는 비눗방울을 깨물어 터뜨리며 맛을 보고, 그 이후엔 관심이 별로 없어졌다. 제노는 질리기도 참 금방 질린다. 덕분에 아빠는 비눗물 범벅이 된 바닥만 열심히 청소해야 했다...




아빠! 이제 먹어도 돼요?! 네?! (흥분+행복한 표정에 주목)

- 생일케이크 대신 생선간식


 이전의 글들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시베리안 허스키는 선천적으로 소화 기관이 매우 약한 편이어서 아무 간식이나 먹였다가는 그에 응당한 대가를 치르기 일쑤다. 첫돌 잔치임에도 맛있어 보이는 수많은 간식들을 배제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 강아지 케이크 등 요즘은 신기한 간식들이 많이 나오지만 워낙에 소화기관으로 인해 여러 트러블을 겪은 터라 생일날 배탈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강아지들이 선호하는 습식 사료 중 생선을 원료로 한 물건을 골랐다.


 작은 강아지들은 한 개 분량을 먹는다는데 제노는 생일날 저녁에만 네 덩어리를 먹고도 더 먹고 싶다면서 반짝거리는 눈빛을 쏘아대며 교태를 부렸다. 무언가 평소와는 다른 하루였음을 자기도 느꼈는지, 비눗방울 때부터 흥분해서 신나는 저녁을 보낸 제노는 평소보다 일찍, 그리고 깊이 잠들었다. 그 잠든 모습이 예뻐서 쓰다듬어주러 다가갔더니 잠든 채로 생선 냄새 가득한 트림을....... 이 멧돼지를 원양어선에 태울까.....




한 살을 의미하는 폭죽초! 제노는 정확히 약 5초쯤 관심을 가져주었다.

- 폭풍성장의 증거들,


 솔직히 말해 1년 사이에 이렇게까지 클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저 막연하게 '많이 크겠지'라고 생각했을 뿐, 사진에서와 같이 그냥 서서도 식탁 위에 턱을 올려 놓을 수 있을 정도로 커질 줄은 몰랐다. 처음 데려올 때만 해도 제노는 전체 신장이 식탁 의자 다리 길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고작 한 살 무렵에 이렇게까지 장성했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어린 시절이 지나치게 휙- 하니 지나가버린 것 같아 슬프기도 한 기분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 - 불과 9개월



 우리는 서로에게 참 많이 적응했다. 잠을 자러 들어가려면 자기도 따라 들어오겠다고 방문 앞에서 기지개를 켜고, 요즘은 눈빛만 봐도 물을 마시고 싶은지, 배가 고픈지, 산책하러 나가고 싶은지를 구분해서 알 수 있다. 가끔 집안일이나 일이 바빠 놀아주거나 신경을 쏟지 못할 때에는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눈치채고 조용히 어딘가에서 잠들어 있다. 물론 그렇게 낭만적이기만 하지는 않다. 가끔 산책을 데리고 나가지 않은 상태에서 엄마와 아빠가 외출해버리거나 하면 금세 사고를 쳐대는 등 확실한 자아 표현을 하기도 한다.


 잠시 보내 둔 캠프에서 돌아오면 분명 다시 적응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서로의 삶의 방식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함께 한 1년간 충분히 몸에 배어든 듯하다.




- 만 1세 이후의 근황


 애견학교에 보내 둔 제노가 너무 보고 싶고, 우리를 그리워해서 침울하게 생활하고 있지는 않을까 애견학교장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날아온 사진들.





 너무너무 행복하고 건강하게 생활하고 밥도 정말 잘 먹고 다른 개들과도 잘  지낸단다...... 다행이긴 한데..... 뭔가 제노 엄마도 나도.....  일말의... 아주 작은... 배신감 비슷한 걸 느낀 것만 같은... 어쩐지 미묘한....


 아무튼 제노는 정말 행복하고 건강하게, 철저한 관리를 받으며 캠프 생활을 즐기고 있다. 잘 지내고 있어 다행이지만, 보내 둔 것은 아주 잠시이지만, 이렇게 혼자 방에서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새 제노가 없는 공간이 마음속으로 옮겨 들어온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분명 책상 아래, 내가 앉은 의자 뒤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잠들어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가 제노! 무사히 자라줘서 고마워!

 

이미 제법 날짜가 지났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로 이 세상에 태어나 어느 가정에 던져졌음에도, 큰 탈 없이 이렇게 예쁘게 자라주어서 고맙다는 마음을 제노에게 전하고 싶다. 더불어 진심으로 생일 축하한다는 말도, 앞으로의 모든 생일들도 함께하자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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