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6일, 여행 411일 차, 볼리비아 수크레
사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남미가 가장 후반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준비가 가장 적었다. 그렇기 때문이 어떤 기대감이나 설렘이 전반적으로 적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늘 '신기한 자연환경이 있긴 하겠지만, 뭐 얼마나 기억에 남겠어?'라는 생각을 늘 해왔다. 그런데 내가 남미 여행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떠올리라고 누가 묻는다면, 여러 장면 중에서도 이 날을 떠올릴 것이다. 그 하얀 도시에서 만났던 친구들을.
11월 4일, 그 힘들었던 광산투어를 마치고도 바로 쉴 수가 없었다. 우유니에서 헤어졌던 친구들인 다해와 유림이를 만나기 위해 수크레로 이동해야 했다. 볼리비아라는 나라만큼이나 수크레도 생소하겠지만, 수크레는 볼리비아의 헌법상 수도이다. 덕분에 볼리비아 전국토에 두 군데 있는 우체국도 있고, 대형마트도 있어 지내기에는 아주 편한 곳이다. 또, 20불도 안되는 돈으로 유럽식 코스밀을 먹을 수 있는 식당들과 저렴한 물가 등으로 세계일주자들에겐 "머무르며 스페인어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도 익히 알려져 있는 도시였다. 이때까지도 스페인어에 대한 큰 욕심이 없어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을 안가졌는데, 돌이켜보면 다소간 아쉽기도 하다.
포토시에서 수크레는 버스로 3시간 여가 걸린다. 늘 그렇지만, 터미널이 번잡하기 때문에 이 시간이 절대적이진 않다. 도착하자마자 친구들이 머무는 숙소에 바로 합류했다. 숙소에는 다해와 유림이 외에 캐나다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다 내려온 대협이와 캐나다사람(?!) 태환이가 있었다. 다시 만난 친구들과는 재회의 인사를, 처음 만난 친구들과는 반가움의 인사를 가볍게 하고 바로 장을 보러 가야 했다. 수크레의 야경이 볼리비아에서는 최고라고 하여 장을 본 뒤 야경을 보고 저녁을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라파즈에서도 찾지 못했고, 우유니와 포토시에서는 더더욱 볼 수 없었던 대형마트에서 장을 본 뒤, 언덕 위의 문 닫힌 호텔로 향했다.
야경은, 사실 평범했다 :P 아이들은 제법 야경이 맘에 들었다고 했지만, 남미의 야경은 대부분이 이렇다. 고원에서 바라보는 지붕들, 노란색 가로등이 쭉 펼쳐지는 환경이니까. 하지만 수크레라는 도시가 워낙 인프라도 좋고 편해서 (고도도 2,800m로 다른 도시에 비해서는 '비교적' 낮아 숨도 잘 쉬어진다.) 환경이 주는 편안함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입장에선 포토시에서 뭔가 말도 안통하는 곳에 덩그러니 혼자 한국인으로 지내다가 수크레로 넘어와서 우유니에서 만났던 한국인 친구들을 또 만나게 되고, 그 친구들과 함께 있는 새로운 친구들을 알게 되어 편했다.
돌아와서는 준비해놨던 재료들로 저녁과 술을 준비했다. 요리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가 했다. 아마 여행 다니면서 가장 늘었던 건 영어보다 요리실력이었을 것이다. 아껴놨던 고추장도 열고 쿠스코에서 다져왔던 냄비밥 실력도 발휘했다. 저 날,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에 술도 참 많이 마셨던 기억이 난다. 다음 날 깔아놨던 술병을 보고 외국인들이 기겁했을 정도니까.
대협이는 캐나다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했던 친구였다. 키도 크고 얼굴도 훤칠한데 성격도 털털한 전형적인 부산 친구였다. 그런데 보기보다 섬세하고 유난(?)도 있던 편이라 막상 얘기해보면 반전매력이 가득했다. 태환이는 캐나다 시민권자인데, 캐나다의 희석이랑도 학교 동기였다고. 직접 알고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좁은 한인 사회에서 이름 정도 알고 지낸다고 하니 그게 또 신기했다. 두 친구 모두 지내온 방식이나 여행하는 스타일을 봐선 남미가 도저히 안맞을 것 만 같았는데, 어떻게 왔을까 싶은 의문이 들었었다. (물론 그런 염려가 현실이 되기도 했지만). 유림이와 다해는 간호사 생활을 함께한 친구들이라고 했다. 일을 정리하고 남미에 코이카로 나와있던 친구를 보기 위해 겸사겸사 여행을 했던 것이라고. 우유니에서도 그랬지만, 저 아이들이 여행을 잘 해나갈 수 있을까 싶었지만 나의 기우였고 정말 여행을 잘 했던 친구들이었다. 힘든 환경에서 의외로 더 잘 버티는.
나눴던 세세한 이야기들이 다 기억날리 없다. 그리고 다 열어볼 수도 없고.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저 친구들과의 기억이 너무 좋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수크레가 백색의 도시로 유명하다고 해서 돌아다니기도 했고, 맛있는 음식이 있다고도 했지만 그냥 친구들이랑 맛있는 음식 해먹고, 벤치에 앉아서 노래 듣고, 이야기 했던 기억이 더 오래 남았다. 도시보다 사람이 기억나는 상황은, 참으로 오랫만이었다. 그리고 저 시간의 기준으로 먼 미래인 작년 까지. 내가 남미에서 사진작가 일을 할 때, 남미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었던 가장 큰 이유기도 했으니까. 남미 여행에서 사진만큼이나 소중한 기억을 만들수 있다는 마음이 들었으니까.
나에게는 사람이 기억되는 시간이었고, 남미 자체를 기억되게 한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