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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타조 May 24. 2020

오늘의 샤워 온도는

감정 들여다보기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그날의 만족감은 대개 퇴근 후 샤워를 할 때 알 수 있다.

샤워기의 물이 머리를 적실 때, 오늘이 괜찮았다면 물의 감촉과 샴푸 향을 풍요롭게 느끼지만, 그 반대의 하루라면, 아직도 남은 일상의 걱정과 감정의 잔재로 인해 물과 샴푸 향 따위는 그냥 흘러내리고 만다.

샤워할 때 감각의 정도가 하루의 행복지수를 대변하는 셈이다.

욕실에 떠다니는 미세한 수증기마저 느껴지는 오늘은 감각이 살아 숨쉬는 것 같다.



#1 뜻밖의 아침 모임

지하철 플랫폼에서 같은 동네에 사는 오래 알고 지낸 후배를 만났다. 서로는 단번에 알아보고 환하게 웃었다. 올라타서는 그간 참았던 회사 이야기들을 쉴 새 없이 교환했다. 마스크 낀 사람들의 적막한 지하철 안에 마흔 중반의 남자 둘이서 수다를 떨어댔다. 내릴 때가 다 되어서야 일부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국역에 내리니 또 다른 회사 선배가 같은 지하철에서 내린다. 인사를 하고 난 그 뒤로는 지난번 팀에서 같이 지낸 후배도 나타났다. 반대편 플랫폼에도 지하철이 도착했는데, 거기서는 지금 팀의 후배도 내린다. 그렇게 인사하고 나니 출구에는 순식간에 다섯 명의 직장 동료가 모여 있다.

서로가 모두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나는 모두 아는 사이이다. 심지어, 마음 터놓고 지낼 만큼의 친근한 동료들이다. 한 명만 만나도 덜 지루할 출근길을 오늘 아침은 넷이나 만나서 출근한다.

좋은 출발이다.



#2 불편한 사람들과 티타

지금의 이 회사로 이직한 후 반년 정도 되었을 때 새로운 팀장이 왔다. 첫 주간회의 때부터 자기 색깔을 드러냈다. 자기보다 이삼 분 늦게 들어왔다며, 예의를 논하며 비난했다. 동일한 맥락으로 2년 이상을 같이 보냈고, 각자의 팀으로 헤어져 지낸지도 벌써 오 년이나 되었다. 당시의 원망이 여전히 가시지 않은 옛 팀장에게서 어제 퇴근 무렵에 갑자기 연락이 왔다. 일 때문에 만나고 싶다면서, 출근 후에 보자고 했다. 보나 마나 무리하거나 아쉬운 부탁일 것이다. 내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었다.


아침 9시, 출근 후 이메일 정리도 하기 전에 전화가 왔다. 그리고, 사내 카페로 향했다. 한 사람이 더 앉아 있었다. 배려 없는 말투가 기억나는 또 다른 선배 부장이었다. 더 커지는 불안함을 숨기고 테이블에 앉았다.

역시였다. 아주 짧은 안부 말 후에는 본인 업무를 늘어놓는다. 이 만큼이나 중요한 일을, 이렇게 어렵게 하고 있으니 당연하게 도와줘야 한다는 요지다. 같이 온 부장도 변함없는 무례함으로 불편함을 보탰다. 마음이 울그락불그락이다. 2년 이상 팀장으로 대우해준 관성과 남아 있는 예의 관념 때문에,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되기도 전에 볼모로 녹다운될 위기에 쳐했다.

하루를 살리기로 용기를 내었다. 자리를 파하고 일어서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두 사람이 전하는 정보에서 아직 정리되지 않은 포인트가 있었고, 거기를 파고들기로 했다.

"죄송하지만, 제가 바빠서요..."

하고 내 말을 시작했다. 정리 안된 포인트와 정리되어야 할 이유를 콕 집어 설명했다. 그게 정리안 되면 도울 수 없다고 나의 요건을 전했다.

"안 부장이 요즘 많이 바쁜 모양이네. 내가 그거 정리하고 다시 연락할게. 시간 내줘서 고마워"

예전과 다른 내 반응에 상대가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정리해야 하는 일은 다른 도움이 있어야 하는 일이기에, 한참이 지나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이스 디펜스다.



# 3. 마음까지 채운 점심

후배 A와 점심 약속을 잡은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지난달 말에 A의 갑작스러운 부친상 소식이 전해졌고, 듣자마자 팀원들과 부산을 다녀왔다. 장례와 사후 일을 마무리한 A는 와줘서 고맙다며 점심을 제안했는데, 몇 번이나 서로 상황이 맞지 않아 미뤄오고 있던 터였다. 그 약속이 오늘에야 성사되었다.

많은 시간을 나누지 않아도 잘 통할 거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다.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거나 관심 분야가 겹치거나 문제를 대하는 방식이 공감이 되는 사람이라면, 굳이 자주 말하지 않아도, 몸짓과 표정만 봐도 호감이 간다. A가 그런 부류의 후배였다.

A의 업무는 그 미션부터 고단해서 안쓰럽게 보일 때가 많다. 동료들의 행복지수를 높이는 거란다. 나조차도 내 행복을 챙기는 방법을 모르는데, 그 어떤 사람도, 자기 행복을 챙기기가 어려울 텐데, 남의 행복을 챙기는 일이라니, A에게 할당한 미션이 코미디 같게 느껴졌다. 사람들에게 '행복해야 해요' 하고 말하는 일이다.


메뉴를 기다리며, 내가 되려 물었다.

"너는 하루 중에 언제가 가장 즐거운데?"

돌아온 대답이 뜻밖에도 출근 시간이라고 했다. 퇴근하면 밤늦게까지 아이와 놀아줘야 하며, 출근 때 엄마와 떨어지기 싫은 딸 이야기도 했다. 엄마랑 떨어지지 싫은 아이의 마음, 그 마음에 미안해하고 회사로 나가는 고단한 슈퍼맘. 아이를 행복하게 해야 하고 동료들을 행복하게 해야 하는 그의 미션에 비해, A는 고작 집과 회사를 오가는 출근길에서 행복을 찾고 있었다.

지난번 빈소에서, 아버지가 왜 갑작스레 돌아가셨냐고 물었더니, 20년 가까이 긴 투병 시간을 지켰다고 했다. 그때도 참 모르고 같이 사는구나, 고민이 많아도 내색 않는  친구구나 했다.


내 무심함과 좁은 시야를 다시 확인했다. 통할 것 느낌의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진정으로 마음을 열고, 시간을 가져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그 다양하고 진정성에 귀를 기울여야 진짜 관계를 얻을 수 있다.

오래 미룬 점심 식사에, 처음 맛본 일본 라멘에 배가 불렀고, 알게 된 A의 사연에 마음이 불러왔다.



#4. 목록 지우는 즐거움

최근 진행되는 많은 업무량 때문에 불금이란 말을 잊은 지 오래다. 오늘도 그 금요일이지만, 야근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오늘 일을 목록으로 기록했다.

- 다른 부서에게 받은 협조 내용의 메일을 정리하여 담당 팀에게 전달하는 일

- 엑셀 데이터를 분석하고 결과를 전달하는 일

- 다음 주에 진행할 세 개의 중요한 미팅 일정을 잡고 공지하는 일

- 임원이 발표할 보고서의 초안을 만드는 일

- 한참 개발 중인 시스템 구축 프로젝트의 상황을 점검하는 일


오늘도 업무 노트의 페이지가 빼곡해졌다. 여기에다 다음 주 아버지의 병원 외래 일정을 확인하고, 작은 아버지가 부탁하신 개인적인 일도 빼먹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오후 동안, 각 업무를 시간별로 할당하여 하나씩 지워나갔다. 저녁 7시가 되니, 목록의 대부분이 끝이 났다. 비록 한 시간의 잔업이 필요했지만, 깔끔해졌다.

내 업무노트는 누런 갱지들을 묶어놓은 스프링 노트다. 누군가는 이 노트를 보고 똥 종이 연습장이라며, 시대적 낙후를 지적하기도 하는데, 누가 뭐래도 나는 이 두껍고 넉넉한 노트가 더없이 편하다. 노트는 업무 내용만 담지 않는다. 회사에서 일어난, 그때그때의 느낌들, 잡다한 정보와 지식들, 지루한 쓸데없이 앉아있어야 하는 회의 시간에 아무렇게나 그리는 낙서 그림까지 남겨 놓는다. 출근하자마자 날짜와 요일, 날씨를 적고 나서, 하루 동안 할 일을 목록 형태로 적는다. 그리고 이 일들이 끝이 났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퇴근 여부를 결정한다. 이 노트에 적는 하루 할 일은 오로지 내게 주어지는 맞춤형 숙제이다. 나 혼자 아는 말로 적어도,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안다. 또 그렇게 해야 끝났다고 표시한다.


오늘은 많이 적고 많이 지웠다. 많이 일한 날이라는 의미이다.

할 일 목록에서 지우는 일이 홀가분하고 즐거운 이유이다.



#5. 즐거운 식사, 즐거운 소리

늦은 퇴근 후에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이미 식사를 마친 아이들이 숙제를 한다며 각자의 방에서 열심히 소리를 내고 있었다.

"웰컴 투 브라질~~"

엄마표 영어 공부 시간이었다. 벌써 4년 동안 엄마의 인내심으로 이뤄낸 성과다. 그 결과로 아이들이 제법 그럴듯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조기 교육이 불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의 5학년과는 비교할 수 없어서 미소가 지어졌다.


저녁밥이 즐겁고, 아이들 소리도 즐겁다.

이 집 가장(家長)이라 더 즐겁다.



샤워기에서 나온 물들이 흘러내린다.

충분한 일어난 거품 속에 한주의 찌꺼기들도 녹아 내려간다.

찜찜한 것, 불편한 것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저, 오늘이 즐거웠고, 샤워하는 지금이 즐겁다.


'주말은 무엇을 해볼까?'


오늘의 온도는 정말 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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