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의 휴가를 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어떻게 하루를 보내볼까 구상했다.오전 아점을 먹고살랑살랑 동네 뒷산길을 다녀와야지, 뒹굴대고 누워서 보는 책도 좋고, 오후에는 낮잠 한숨을 자야겠다. 저녁에 볼만한 영화는 없을까?
오늘 휴가는 지난 며칠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였다. 열이 났었고 (코로나 검사까지 해봤다), 배앓이도 있었고, 몸살이 난 듯 천근만근 같았다. 그만큼 한주가 축 늘어진 터라 기력도 회복하고, 기분도 전환하고 싶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신기하게 괴롭히던 나쁜 장애들이 완전히 사라져서, 컨디션도 좋아졌다. 모처럼 휴가에 몸도 기분도 좋아서기대하며 맞이하려는 중이었다.
'위잉~위잉~'
형의 전화였다. 불안이 엄습한다. 이 시간에 오는 형의 전화는 좋지 않은 일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최근 몇 년간 따져보니 형이 이 시간에 전화하는 경우는 숙제 같은 일들이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부모님의일이기도 했다. 아버지 건강 어디가 안 좋다거나, 엄마가 서운한 마음이 있다던가, 아니면 낡은 고향집에 수리가 필요하니 알아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어느 하나 간단치가 않아서,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야 하거나, 장시간의 신경이 쓰이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오늘 요지는 아버지의 약 문제였다. 아버지 약이 벌써 다 떨어졌으니, 확인을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연말이라 바쁜 형에 비해 나는 한가한 편이라 부탁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지난달에 아버지와 같이 병원에 다녀온 일을 떠올리며, 당시 3개월치를 처방받은 기억이 났다. 내년 2월까지는 약이 충분히 있어야 하는데, 뭔가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버지, 약 덜 먹으면 좋지 뭐.."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엄마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부아가 났다. 본인 몸도 아프고 아버지도 챙겨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간혹 내려놓는 일은 있어도 이렇게 말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너무 다짜고짜여서 당황스러웠다. 약을 담아두는 가방이나 서랍장은 잘 찾아보셨는지, 어떤 약이 지금 부족한지 확인하려고 한 전화에 한 엄마의 답변이었다. "아니, 엄마는 대체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아이고 참, 정말!!" 핸드폰에다 그만 화를 잔뜩 묻혀 보내고 말았다. 안달 난 한쪽에 비해 시큰둥한 한쪽 때문에 결국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야심 찬 나의 하루 계획이 망했음을 직감했다. 내 욕심을 챙기면서 고향 일을 수습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몇 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다른 방법이 없는지 이것저것 살펴보아도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상황을 들은 아내가 그냥 다녀오라고 했다. 아내의 공감과 격려로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
비 때문에 소풍이 취소되면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초등학생 시절이 기억난다. 글썽이는 눈물을 머금고 학교에 가고 눅눅한 교실에서 우울한 친구들과 앉아 있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경우는, 삶이 기대대로, 생각대로 되는 일이 칠할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만하면 매우 감사한 일이다. 나머지 삼할은 아쉽고 아프지만, 그렇다고 울고불고 난리치는 건 이제는 안된다. 어른의 품격은 아니니까.
'그럴 수도 있지 뭐.'
수시로 계획을 바꾸고, 마음도 바꾸는 것이 어른의 품격이니까.
오늘 계획은 모두 취소했다. 대신, 고향으로 가는 일정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지난 몇 시간 감정을 글로 적으니 마음도 추스려지고 부아도 사라지고제법 괜찮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