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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타조 Aug 23. 2021

매일매일이 시합같아요

아빠 일은 처음이라

세트 스코어 2:0


심판을 보던 나는 첫째 아이를 불러 요령을 알려주려 했다. 서브를 넣을때, 백핸드 쪽으로 넣으면 못 막으니까 그리 해보라고 일러주고 싶었다. 하지만, 녀석은 앵그리버드처럼 상기된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내저었고, 결국 내 말을 들으려 오지 않았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들어보라는 기대로 나는 이 팽팽하고 살벌한 탁구장에 살그머니 요령을 던져놓았다. 2세트까지는 첫째가 일방적으로 밀렸다. 탁구 실력이야 둘 다 엉성하지만, 운동신경이 그나마 나은 둘째는 요령 있게 게임을 임했고, 그에 반해 첫째는 힘만 잔뜩 들어갔을 뿐, 대부분의 공이 빗맞거나 네트에 걸렸다. 너무 일방적이라 마음은 첫째를 응원했지만, 경기는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3세트도 그렇게 끝날 거라며 안타까움만 더해갔다.




3세트

반전이다. 한두 번 리시브를 성공하며 네트를 넘기던 녀석이 어떻게 감을 잡았는지 리턴도 제법 해냈다. 그리고, 자기의 서브가 되자 놀라운 일을 벌였다. 백핸드 쪽으로 서브를 넣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 공이 백핸드 쪽으로 가더니, 다음부터는 여러번 그리고 빠르게 서브를 넣었다. 예상대로 둘째에게 백핸드는 무리였다. 둘째의 자세는 포핸드 쪽은 대응이 되지만, 너무 테이블 오른쪽에 서 있던 나머지 백핸드는 번번히 넘기기를 실패했다. 몇 번의 서브를 못 받던 둘째도 당황하기 시작했고, 자기 서브마저 실수를 범하며 경기는 반대의 일방향이 되었다. 세트 스코어는 다시 2:2, 나는 지체없이 경기를 종료시켰다. 더 이상 이 혈투를 진행했다가는 어느 한쪽이 심각한 내상을 입을 것이고, 이후 고생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시합이 끝나자 둘은 젖은 몸으로 씩씩댔다. 아쉬움도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런데, 첫째가 울기 시작했다. 아무엑도 눈물을 보이는 게 싫었던지 돌아서서 훌쩍거렸다.


쌍둥이 아들들을 불러 오랜만에 찾아간 탁구장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코로나로 탁구장에 발길을 끊은 지 거의 일 년이 다 되었다. 집에만 뒹굴거리던 녀석들이 안쓰러워 운동 좀 하라는 잔소리와 함께 거의 반 강제로 불러 데려갔다. 툭튀어나온 아이들의 입모양이 증명하 듯 마지못해 시작한 녀석들은 쭈뼛거리며 공을 쳤다. 20여분 지나자 곧 재미를 붙였고 나도 아이들도 땀이 흐르기 시작하며 진지해졌다. 제법 서브도 잘 넣고 리시브도 잘 되니 재미가 붙은 거였다. 그러다 첫째가 시합을 제안했다. 나랑 하는 것은 결과가 뻔했기에, 약간의 고민 후에 둘이서 시합을 붙여놓았다. 하지만, 이게 실수였다. 쌍둥이에게 이런 대결은 굉장히 예민하고 나쁜 결과를 종종 가져오기 때문이다. 승패가 갈려지면 말그대로 'Winner takes it all'로 끝이나곤 했다. 한쪽은 하늘을 날아가고, 또 한쪽은 세상을 잃어버리는 상황을 맞이한다. 그래서 이런 승부는 최대한 자제하되, 해야 할 경우는 적절한 조절과 신중하게 살펴야 했다.


결국 탁구장에서 우려하는 일이 터지고 말았다. 탁구는 운동 능력이 좌우하는 것 같아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 심리적인 면이 매우 큰 운동이다. 서브넣는 방식이라던가, 상대의 약점을 파고는 일, 실수해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까지 멘탈적인 요인도 크게 좌우하는 시합이다. 나도 어릴 때 동네 교회에서 종종 치곤 했는데, 그때 라이벌인 친구와의 수백 번의 시합에서 탁구 시합은 마음 관리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녀석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운동 신경이 좋은 둘째가 처음 두 세트를 이긴 반면, 뒤 이은 두 세트는 멘탈을 부여잡은 채 둘째의 약점을 간파한 첫째가 만회한 게임이었다. 심판이자 관객이자 두 아이의 아빠인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애처로움과 당당함과 치열함과 환희가 있는 극장 관람을 한 셈이었다.


집에 돌아올 때까지 첫째는 계속 눈물을 훔쳤다. 괜히 시합을 했구나 하며, 어깨를 토닥거리기도 했고, 괜찮다고 잘 했다고 위로도 했다. 하지만, 허사였다. 돌아온 아이는 끝내 화장실에서 감정을 터뜨렸다.

"매일매일이 OO이랑 시합을 하는 기분이예요."

학원 수업, 학교 공부, 시험, 숙제 같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공부 쪽에 결을 타고난 둘째는 이런 것들에 대한 성취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가끔 첫째가 잘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둘째가 좋은 결과를 보였다. 그 때문에 항상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숙제와 시험에서 매일매일 패하는 느낌이 든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일로 아이는 몇 번이나 고충을 말했고, 그때마다 설명하고 위로하면서 아이를 다독거려왔다. 하지만, 오늘 탁구는 또 그런 감정의 연장선이었다.


"너는 그림을 잘 그리잖아. 기타 실력도 네가 낫고. 그뿐인 줄 알아?"

예술 방면은 확실히 둘째보다 나았다. 뿐만이 아니라, 손기술도 좋아서 만드는 데 능한 편이었다. 방과 후 과학교실 수업이나 레고 같은 것은 쉽게 뚝딱하며 가끔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기도 했다. 라면을 끓여도 잘 엎어버리는 둘째와는 달리 첫째는 손이 능숙했고, 집안 청소와 정리하는 일도 첫째가 승자였다. 심지어 말귀를 알아듣는 일, 사람들 눈치를 살펴 적재적소에 던지는 말과 행동도 첫째가 나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일들은 학교, 학원, 숙제, 시험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승리였다.


삼십여분을 엄마와 함께 토닥여 주었다. 아이의 잘하는 부분을 일깨워주기도 했고, 학교 공부만 잘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며 둘째의 부족함도 알려주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부족한 점은 있다는 취지로, 자기 집을 찾아가지 못했다는 아인슈타인 이야기, 공부는 못했을 것 같다는 유재석 님의 흉도 보았다. 아빠도 수학은 정말 못했고, 엄마는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었던 중학교 친구 이야기도 했다. 결국 삼십여 분간의 노력으로 아이의 마음을 풀었다.




집안에 평화가 왔다. 탁구로 시작한 전쟁이 끝난 것이었다. 하지만, 매일매일이 승부라는 아이의 말이 가슴에 남았다. 녀석의 말이 삶을 관통하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정말 매일매일이 승부가 아닐까. 평생 동안 승부가 아닐까.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이든 누군가와는 비교하며 산다. 유치원, 학교, 군대, 회사, 동아리 모임, 심지어 가족 안에서까지,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나 비교를 하게 된다. 마음의 전장이다. 심지어 티브이에도 유튜브에도 불특정한 이에게서 열등감과 우월감이 들 때가 있다. 하나하나를 모두 헤아리고 마음 쓰는 동안 매일매일이 승부를 거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차마 이 말은 아이이게 할 수 없었다. 그냥 나중에 시간이 흐르며 스스로 느껴가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은 탁구 승부로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그만큼 녀석도 얻은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하며 또 다시 물었다.

"그런데, 아들. 다음에 또 탁구 한판해야지."

머뭇거리다가 녀석은 웃으며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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