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번째 이야기 [2024. 2. 28. 수]
나는 작지만 마당이 있는 집에 살았다. 그곳엔 내 것은 없고 엄마가 주로 사용하는 세탁기, 장독대 그리고 엄마의 화분이 줄지어 서 있었다. 내 공간은 아빠가 짜놓은 평상. 그것도 따져보면 우리 가족의 것이었으니 온전한 내 것은 아니었다. 내 공간은 옥상. 빈 공간에 고무줄만 있으면 놀 수 있는 활발한 아이였다. 고무줄놀이는 금방 싫증 났지만, 난 옥상에서 노래도 부르고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엄마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마당에 나와 화분에 물을 주고 계셨다. 꽃처럼 피어난 선인장, 키가 작은 다육이 그리고 이름 모를 여러 식물을 키우셨다. 10여 종이 옹기종기 모여 엄마의 따스한 격려의 말을 들으며 물을 마셨다. 엄마는 초록색 호스를 수전에 꽂고 구석구석 물을 주셨다. 콧노래를 부르며 물을 주는 엄마의 모습에 나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엄마를 졸라 물을 주었는데, 물살을 못 이기고 호스를 놓치고 말았다. 호스는 공중에서 춤을 추더니 이내 바닥에 떨어졌고 나는 그 모습이 우스워 깔깔깔 웃었다. 곁에 선 엄마는 후다닥 물을 잠그러 뛰어갔다. 그리고 여전히 웃고 있는 나에게 화분 하나를 가리키며 물이 참방참방해서 나무뿌리가 썩을지 모른다고 웃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식물은 물을 주지 않아도 죽지만, 많이 줘도 죽는다는 것을. 나는 미안한 마음에 “아니. 안 먹으면 되지 먹고 죽어?”라고 내뱉었고, 엄마는 다시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며칠 동안 열심히 그 아이가 잘 살아있는지 수시로 확인했는데, 웬 꼬마가 성가시게 군 덕분인지 식물은 튼튼히 잘 자랐다. 그 이후로 한 번도 엄마의 화분에 물을 준 적 없다.
그래도 비가 많이 오는 여름날이면 엄마와 함께 화분을 안으로 들여놓던 기억. 추운 겨울날에는 우리 집 마루까지 턱 하니 차지하고 있던 녀석들이었다. 추운 데 있으면 죽는다는 말에 식물이 잘 살아있는지 궁금해 손톱으로 잎을 꾹꾹 눌러보았다. 손톱에 밴 초록의 향을 맡으면서도 살았는지 아닌지 모르는 나였다. 엄마는 다음날 식물의 잎이 상한 걸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누가 그랬어?”라고 가는 눈을 하고 나를 봤다. 나는 어느 날은 모른 척하고 어느 날은 내가 그랬다고 말했다. 그럼 엄마는 “너도 꼬집혀 봐”라며 내 볼을 꼬집었다. 나는 반성의 기색 없이 “나보다 쟤가 더 소중하냐”며 서운해하곤 했다.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그러거나 말거나 엄마는 상처 난 잎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럼 난 또 몰래 식물을 쓱 치고 지나갔다.
어릴 적 나의 짓궂음 때문인지 우리 집에 들어온 식물은 모두 얼마 못 가 흙이 되었다. 오직 여인초만이 무럭무럭 자라 새 잎을 피웠다. 어쩌다 한 번씩만 물을 줘도 불평불만 없이 아주 쑥쑥 자란다. 언젠가 키가 천장에 닿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다. 엄마가 그런 것처럼 나는 여인초에게 물을 줄 때면 잘 자라주어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다. 우리 집 대왕초록이가 잘 자라는 비결이겠다.
@숨돌X마음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