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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전신간 Mar 27. 2023

제 화장품에서 '색'다른 변화가 느껴져요.

변심일까, 변색일까? 정답을 알려드립니다.


Q. 소비자: 저는 몇 년째 이 립 틴트만 써요. 근데 이번에 다 쓰고 또 같은 걸로 샀는데, 막상 발라보니 색이 바뀐 거 같아요. 기분 탓인가요?

A. 연구원: 아닙니다. 정말 다를 수도 있습니다.


몇 번을 제조하든, 제품은 가능한 한 표준품과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다만 화장품은 일반적인 공산품처럼 금형이나 시스템에 짜 맞춰서 만들지 않고, 공장 설비에 원료를 투입하고 작동시키는 제조자가 만듭니다. 그래서 절대로 표준품과 모든 면에서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립 틴트를 말씀하셨으니, 예시도 그걸로 한 번 들어볼까요.  




큰 배를 띄우려면 사공도 많아


항상 쓰던 립 틴트를 샀는데 이번 게 유독 색깔이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 그 첫 번째는 제조 과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표준품과 생산품의 색상 비교는 제조자의 감각과 경험에 의존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렇다 보니 현장에서는 숙련된 제조자의 경력이 중요하며, 만일 비교 결과 차이가 분명한데도 제조자가 이를 유사하다고 판단하면 소비자는 지난번과 똑같은 제품을 샀을 때 제품 색상이 달라졌다고 느끼게 됩니다.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컬러 차이를 만든 원인이 제조자라고 곧바로 특정할 수는 없습니다. 색상의 확인과 이후 단계의 진행은 제조자 단독으로 결정하는 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사라는 분업 체계 속에서는 혼자서 결정하는 일이 잘 없습니다.


화장품이 소비자에게 오기까지, 그 이전에는 많은 의사 결정의 주체들이 엮여 있습니다. 제품을 기획한 브랜드 매니저, 개발한 연구원, 제조팀, 품질팀, 생산팀, 물류팀, 영업팀 등 정말 많은 부서들을 거칩니다. 언급하지 못한 부서들까지 세면 아마 10개 부서가 조금 안 될 거 같습니다.


위에서 말한 부서들 중 내용물과 관련해서 직접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은 브랜드 매니저와 연구원, 제조팀, 품질팀을 들 수 있는데요.  의사 결정 과정에서 이들이 모두 만장일치로 ‘ok’라고 했기 때문에 소비자가  제품을 발라 보게  겁니다.


제조자는 위의 9가지 색을 모두 구별한다. 참고로 현업에서 대부분의 제조자는 남성이다. 컬러 감각은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다. (출처: 웹 검색, 하단 기재)

만약 제조팀은 색상을 제대로 봤는데, 브랜드 매니저나 품질팀에서 ‘다르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시간과 노력, 소모한 원료는 아깝지만 다시 제조를 하거나 해서 그렇게 판단한 사람을 납득시켜야겠죠. 이 역시 회사의 특성입니다.


회사에서는 사소한 실수로 큰 파장이 일기도 하고, 반대로 작게 분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체로는 일이 크게 잘못될 가능성을 경감시켜 줍니다. 그리고 조금은 아쉬운 말이지만, 어디서 태클이 걸려오든 '어쩌면' 소비자가 받아보는 결과는 같을 겁니다. 현재의 이 화장품 개발 파이프 라인에서 소비자는 참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표준품과 제조품


여기서 잠깐, 연구원은 n차 제조품에 대해서는 위 결정 과정에서 제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연구원은 표준품과 관련한 업무가 주된 업무라서 그렇습니다. 표준품은 연구원이 연구소에서 만든 제품입니다. 이를 스케일 업, 공장 제조 규모로 처음 제조한 제품을 초도 제조품이라고 하는데, 연구원은 이 초도 제조품이 형태나 색상 면에서 표준품과 유사한지, 앞으로도 동일한 과정으로 계속 제조 가능한지를 판단합니다. 이 과정에서는 연구원의 판단이 전적으로 중요합니다. 내용물의 특성에 대해서 현재 단계에서 가장 많이 파악한 사람이기 때문이죠.


만약 동일한 제품이 이렇게 다르면, 소비자 입장에선 매우 당황스러울 것이다. 사실은 리뉴얼 전 후라 다른 게 정상이다.(출처: 웹 검색, 하단 기재)

이 초도 제조품을 내부적으로 제조팀, 품질팀을 거쳐 브랜드 매니저에게 전달했을 때 최종 승인을 받으면 한 고비는 넘깁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2차, 3차, 그리고 n차 발주를 받아 제조를 하는 내용물의 재현성 판단은 연구원 없이 제조팀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재료가 달라져서 


컬러가 다른 이유, 제삼자가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색소 원료의 로트(1회 제조 단위, 동일한 조건 아래에서 만들어진 균일한 특성 및 품질을 갖는 제품군) 편차가 너무 큰데, 그걸 원료사가 납품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품질팀은 원료 표준품과 비교해서 적합하다고 했는데, 막상 제조팀에서 제조를 해보니 표준품과 너무 컬러가 다른 거죠.


당장 손 쓸 수 있는 수준 혹은 그런 상황이 아니라, 하는 수 없이 브랜드 매니저는 그걸 컨펌해서 전국 매장으로 뿌려졌으며 고객님은 그걸 고객님 인생에서 n번째로 산 겁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실제로 잘 없고 색깔이 미세하게 달라졌으면 몰라도, 원래 빨간색이어야 하는 제품이 누가 봐도 주황색이 됐으면 그걸 컨펌하는 경우는 없을 겁니다.


수크랄로오스나 아스파탐은 설탕처럼 단 맛은 나지만 포도당으로 분해되지 않아서 체내 혈당을 상승시키지 않아 최근 큰 유행이다. (출처: 웹 검색, 하단 링크 기재)

혹은 원료사 사정 상 원료를 단종해서 다른 대체 원료를 사용했는데, 이전 원료와 발색의 차이가 나면 결과물도 컬러 차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연구소에서는 대체 원료로 기존과 최대한 동일한 색을 만들기 위해서 다시 조색하지만, 시작부터 재료가 다르니 결과 또한 변화 이전과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요즘 대체당을 설탕이나 액상과당 대신 넣은 탄산음료가 많이 출시되고 있는데요. 모두 단 맛이 나긴 해도 분자 구조 등 화학적 특성의 차이 때문에 설탕과 완전히 동일한 단 맛을 내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일반 펩시와 펩시 제로 슈거가 재료의 차이부터 시작해서 결과인 맛도 동일하지 않듯, 화장품에서도 원료가 다르면 그 결과인 제품 컬러 또한 같지 않습니다.  




원하지 않은 커스터마이징


변색의 원인은 소비자에게서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립 틴트의 용기에 달린 솔대는 입술에 직접 닿기 때문에 오염되기 쉽습니다. 입술에 사용하는 제품은 그 형태와 사용 방식 때문에 필연적으로 내용물이 외부 공기에 노출되고, 오염됩니다. 그래서 사용하면서 조금씩 변색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미처 모르고 쓰다가 한참 뒤에야 새 제품과 비교하고 깨닫게 되었을 텐데요.


입술에 사용하는 화장품의 종류. 1번부터 3번은 메이크업 제품, 4번부터 6번은 보습제품이다. 5번의 튜브 타입을 제외하면 직접 공기나 입술에 노출된다.(출처: 구글 이미지 편집)

보통은 개발 단계부터 이런 립 제품의 취약성을 고려해서 방부 시스템을 적용합니다. 그래서 제품 주인 한 명이 자기 것 하나만 쓸 때는 변색이나 기타 품질 변화 이슈가 잘 없는 편이죠. 한편 화장품 매대에 놓인 테스트 발색용 제품은 하루에도 수십 명씩, 몇 개월 동안 발라봅니다. 이는 아주 극도의 방부, 변색 테스트 조건에 해당합니다. 그런데도 새 제품의 색깔과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테스트 제품이라는 용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장품도 식품의 유통기한과 유사하게 개봉 전, 후 사용기한이 있습니다. 모든 화장품은 방부나 변색 테스트에서 적합 판정을 받은 기간을 품질 보증 기한으로 출시합니다. 따라서 사용 기한이 지난 제품의 변색은 회사가 보증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사용 기한 내라고 한들 소비자가 그동안 제품을 어디에 보관하고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회사 측에서 원인을 규명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가능한 작은 용량으로 출시하고, 빨리 쓰는 만큼 개봉 후 사용기한도 6개월 남짓으로 길지 않게 설정합니다. 보증된 기한 밖의 예기치 않은 상황과 변수에 대해서 회사가 모두 대응할 수 없으니, 정한 만큼만 품질을 보장한다는 의미기도 합니다.


몇 년에 걸쳐 진짜 조금씩 아껴 쓴 제품이라도, ‘한 번 외부에 노출되면 그때부터 개봉 후’ 기간이 시작됩니다. 사용 기한이 경과하면 색깔이 달라지든, 향이 없어지든 해당 제품에 대한 품질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정판 컬러, 고가 제품이라고 아껴 쓸 생각 마시고 제품이 최상의 상태일 때 마음껏 그 아름다움을 누리세요.




마치며


화장품은 공산품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사람의 손이 전혀 닿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육안으로 판별하는 항목은 물론이고, 용기에 내용물을 충전하고 단상자를 접는 등등 다양한 작업에서 사람이 개입하죠. 그래서 모든 화장품은 어떤 면에서는 반(半) 수제 화장품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는 일에는 변인 통제가 중요합니다. 표준품이라는 기준이 있고 매 로트마다 동일한 방식으로 제조를 하면 결과도 같아야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한 경우들은 회사의 규모와 상관없이 종종 발생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조자, 연구원은 개인적으로도 수시로 확인하고 다음 결정 권자에게도 확인받는 절차를 거칩니다. 이러한 시스템의 정교함과 업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바로 품질력입니다.


아무튼 같은 제품도 제조 단계나 소비자한테서 색깔이 달라질 가능성이 없지 않은데, 간혹 완전히 다른 제품임에도 서로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색조 없다’ 더니 똑 닮은 모양새를 하고 있는 걸 보면 참 묘합니다. 브랜드사와 제조사가 다른데도 아주 근소한 차이만 느껴지는, 쌍둥이 같은 제품을 늘어놓고 저렴이 버전, 혜자템을 선정하는 것도 색다른 재미입니다. 같은 제품의 리뉴얼 전 후 컬러의 차이를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고요. 제가 색조 제형 연구원이라서 하는 어떤 변명은 아닙니다.






 이미지 출처

1) https://www.powderroom.co.kr/board/20200463

2) https://www.yuripibu.com/article/상품-사용후기/4/945/

3) https://www.mk.co.kr/economy/view.php?sc=50000001&year=2022&no=359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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