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무슨 날이야?

by 오늘도 생각남

학창 시절 내가 도시락 뚜껑을 열면 친구들은 나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도시락으로 내가 ‘김밥’을 싸오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늘 누구 소풍 가냐?”

“오늘 무슨 날이냐?”


친구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내 김밥을 하나씩 집어먹었다. 내 도시락은 눈 깜짝할 사이에 완판(?)이 돼곤 했다. 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으셔서 김밥도 맛있게 잘 싸셨다.


때는 대학시절 졸업을 한 학기를 남겨놓고 휴학을 하여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 때였다. 1,0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기본서들을 달달 외워야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시험 날짜는 다가오는데 진도는 안 나가고. 하루하루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점심은 김밥을 먹기 시작했다. 독서실 휴게실에 앉아서 김밥을 먹으며 책을 한 페이지라도 더 보기 위해서였다. 새삼 ‘김밥’은 참 편리한 메뉴라는 생각을 했다. 반찬을 따로 먹을 필요도 없고 입 안에 하나 넣으면 손도 자유롭고, 입도 자유롭고. 그러다 문득 학창시절 ‘어머니의 김밥’이 생각났다.


‘아하, 어머니가 김밥을 싸주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시간 절약. 어머니 김밥에 담긴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어머니는 반찬 집어먹을 시간조차 아껴주기 위해서 학창 시절에 하루가 멀다하고 김밥을 싸주셨던 것이다. 아들은 스물여덟이 돼서야 비로소 깨닫는 시간의 중요성을 어머니는 열네 살 아들에게 가르쳐 주고 계셨던 것이다. 아들보다 10년을 앞서 계셨던 어머니. 하지만 학창 시절에 어머니의 깊은 뜻을 알았다 하더라도 실천은 어려웠을 듯하다. 다들 시끄럽게 떠들며 놀고 있는 점심시간에 공동체의 룰(?)을 깨고 혼자서 김밥을 먹으며 책을 보는 것은 여간의 용기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돌아보면 어머니는 어렸을 적부터 시간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하셨다. 형과 내가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해질 무렵이었는데 한 번은 어머니께서 형과 나를 마당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멀리서 지고 있는 노을을 쳐다보게 하셨다. 우리 집은 서쪽 끝 바닷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마당에 나가면 멀리 지평선 너머로 노을이 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0여분 쯤 쳐다봤을까? 하늘에 떠 있던 태양이 지평선에 걸리더니 뉘엿뉘엿 사라지는 모습을 슬로 모션으로 볼 수 있었다.


“어때? 시간이 흘러가는 게 보이니?”


어머니는 초등학생 두 아들에게 시계가 아니라 자연을 통해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간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은 신 거였다. 당시 너무 어렸던 우리 형제는 어머니의 깊은 뜻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시간의 중요성을 아들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하시던 어머니의 열정적인 모습은 또렷이 기억이 난다.

어른이 돼서 김밥을 싸 보니 김밥 싸는 일은 여간 시간이 걸리는 일이 아니었다. 햄, 계란, 시금치, 단무지, 우엉 등 재료들 장부터 봐야 했다. 개별 재료들을 볶아서 손질도 해야 하고, 김말이로 하나씩 마는 것도 일이다. 김밥을 다 말고 나서 설거지할 것은 왜 또 그리 많은지.


어른이 돼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어머니는 당신의 시간을 한참 투자해서 아들의 시간을 아껴주려 하셨다는 것을. 우둔한 아들은 나이가 들어서야 어머니의 깊은 뜻을 하나씩 이해하게 된다.

학창 시절 내 도시락의 김밥을 집어먹던 친구들이 ‘무슨 날이냐’며 물었을 때 나는 ‘그냥’이라는 대답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날이 무슨 날인지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응, 시간 아끼는 날! 어머니가 당신의 시간을 투자해서 내 인생의 시간을 아껴주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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