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보내주신 37만 원

by 오늘도 생각남

대학시절 나의 한 달 용돈은 40만 원이었다. 40만 원은 큰돈이었지만 집 떠나 타지에서 학교를 다니던 내게 넉넉한 돈은 아니었다. 기숙사비 10만 원, 점심 식비 6만 원, 지하철 요금 왕복 4만 원, 핸드폰 요금 5만 원, 이것 저것 떼고 나면 순순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은 약 10만 원 정도였다. 평소 점심은 3천 원짜리 학생회관 메뉴로 해결을 했는데 가끔 친구들 따라 일반 식당에 가서 외식(?)을 하는 날에는 한 달 여유 돈이 10만 원에서 조금씩 줄어들었다.

시골에서 고생하시는 아버지, 어머니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용돈을 더 올려달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 가끔 ‘용돈 부족하지 않냐’고 물어보셨지만 ‘괜찮다’며 대답할 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나로 인해 당신 계획보다 훨씬 초과 지출을 하신 터였다. 아버지는 어렸을 적부터 가정 형편 상 ‘재수학원은 절대 없다’고 단언하셨다. 하지만 나는 어찌어찌하여 집을 떠나 서울에서 재수를 했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국립대학’ 가는 게 효도라는 말씀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셨었다. 나도 서울에 있는 국립대학을 가지 못한다면 지방에 있는 국립대학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그런데 또 어찌어찌하여 서울에 있는 사립대학에 다니게 됐다. 나는 부모님께 돈 먹는 하마였다. 지은 죄(?)가 많았던지라 용돈 얘기는 감히 꺼낼 수도 없었다.

한 번은 아버지께서 용돈을 보내주시는 날이라 통장을 확인했는데 37만 원이 입금돼 있었다. 40만 원에서 3만 원이 빠진 금액. 30만 원도 아니고 35만 원도 아니고 37만 원?? 금액 상 실수로 잘못 보내신 것은 아닌 듯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3만 원을 더 보내주실 수 없으셨던 것 같았다. 3만 원이면 3천 원짜리 학생회관 점심을 10번 사 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문득 3만 원을 보내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계실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왜 37만 원이냐는 연락을 드릴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아버지께서 속상해하고 계실 상황을 확인하게 될까 봐.

대학시절 등록금은 온전히 아버지께 의존하고 있었다. 용돈을 벌기 위해 가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대학시절 동아리 활동이나 사람을 만나는 일 등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었던 나는 등록금을 벌 정도의 아르바이트를 하지는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어느 명절날이었다. 고향 집에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아버지께서 지나가듯 말씀하셨다.

“아이고, 이제야 다 갚았다. 너희 대학 등록금”

"형 등록금은 재작년에 갚았고, 네 등록금은 올해까지 다달이 내서 이제 다 갚았다"


아버지는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우리 삼 남매 등록금을 대주셨던 것이다. 원금 분할 상환방식으로 우리가 졸업한 후에도 매달 학자금을 조금씩 갚아오셨던 아버지. 형과 나는 두 살 차이였는데 아버지는 동시에 두 아들의 등록금을 마련해야 할 때는 정말 힘들었다고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듣는데 아버지께서 용돈으로 37만 원을 입금해주셨던 그때가 떠올랐다. '자식들이 취직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학자금 대출받은 것을 인계해주시지 그랬냐'라고 말씀드렸더니 하시는 말씀.

“아니다. 학자금 대출 해결하는 것까지가 내 몫이지”


의문의 1패. 직장을 잡고서 비로소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고 독립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버지는 보이지 않게 긴 시간 동안 경제적 도움을 주고 계셨던 것이다. 사회 초년생 아들이 힘들지 않도록 그 ‘짐’을 당신이 짊어지고 계셨던 것이다.


가끔 술자리에서 아버지는 내가 뵙지 못했던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실 때가 있다. 할아버지 덕분에 정년이 1년 늘어나셨다는 말씀이셨다. 아버지는 군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셨는데 할아버지께서 아버지 출생신고를 한 해 늦게 하신 덕에 아버지의 퇴직 시기가 실제 당신 나이보다 한 해 늦춰질 수 있었다는 말씀이셨다.


“자식은 부모님 생전에도 부모 덕으로 살고, 부모님 돌아가셔서도 부모 덕으로 사는 것 같구나”


아버지도 의문의 1패. 할아버지의 의도된(?) 늑장으로 아버지는 연세보다 1년 더 직장에 몸 담으실 수 있었다. 그 덕에 내 학자금을 갚는 것도 그만큼 수월하셨을 것이다.


나에게 37만 원은 절대 잊을 수 없는 돈이다. 할아버지의 숨은 사랑과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사랑을 가르쳐준 아주 특별한 금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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