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잘 살아야 돼요. ‘전원일기’ 보면서 저런 엄마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던 분들한테 ‘으이구’ 이런 생각을 주면 안 되잖아요.”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22년 동안 국민 엄마를 연기했던 배우 김혜자 씨의 말이다. 그녀는 ‘전원일기 2021’ 다큐에서 <전원일기> 속 이은심(극 중 김혜자 씨 역)을 사랑해 준 시청자들을 위해서라도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 아버지 역할을 했던 최불암 씨 역시 같은 의무감 속에 살고 있었다. 그도 국민 아버지로서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 무단횡단 한번 하지 않고 살아오고 있다고 했다.
갑갑함이 전해졌다. ‘국민 배우’라는 호칭이 한편으론 그들에게 행복이었고, 다른 한편으론 족쇄였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최고’라고 치켜세운 엄지 손가락. 만약 국민배우가 티끌 같은 잘못이라도 저질렀다면 세상은 엄중한 잣대로 엄지를 땅바닥 방향으로 뒤집으며 야유를 보냈을 것이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고 얘기하며.
‘국민 배우’라는 족쇄의 무게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학창 시절 나는 ‘착한 사람’이었다. 소위 범생이였다. 성품과 관계없이 내성적인 성향과 특별히 호불호가 없는 무색무취의 성격, 거기에 자그마한 성실함이 더해지니 나는 영락없는 모범생이 되어 있었다. 일상생활에서 내 의견이나 호불호를 표현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솔직히 특별한 내 의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YES맨’이었고, ‘괜찮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주변 사람들은 내 의견을 거의 묻지 않았다. 어차피 내 대답은 YES일거라 생각하면서. 어느새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소풍을 갔을 때 일이다. 한 친구가 내가 갖고 있던 장난감을 달라고 했다.
“야, 그 장난감 좀 줘 봐. 안 주면 너랑 안 논다”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내 장난감을 달라고 하면서 장난감을 주지 않으면 놀지 않겠다니. 그 친구는 나와 친하지도 않았고 나는 같이 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 친구는 나보다 덩치도 작았고, 나를 위협할 수 있는 정도로 힘이 세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친구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자기 욕망을 스스럼없이 표현할 수 있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나는 장난감을 그 친구에게 내주었다. 장난감을 줄 이유는 하나도 없었지만 나는 거절하지 못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꿔다 놓은 가마니처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어린 시절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했고, 나는 내 의견을, 감정을, 욕망을 누른 채 그들의 뜻에 따랐다. 그리고 ‘참 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착한 사람’이라는 평가는 내 생각과 의견을 조금씩 짓눌러갔다. 나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 족쇄는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였다. 항상 ‘YES’라고 답하고, ‘괜찮다’고 말하는 내게 짝꿍이던 친구가 대뜸 물었다.
“너는 무슨 생각으로 사냐? 로보트냐?”
뼈가 아릴 정도로 아픈 지적이었다. 누구한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들킨 것처럼 부끄러웠다. 가슴속에 있는 말을 꺼내 본 적이 별로 없었고, 내 취향을 깊이 고민한 적이 없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친절했고, 습관적으로 양보했다.
고3 수능이 끝나고 ‘단체 미팅’을 주선한 적이 있었다. 중학교 때 여자 동창생에게 부탁해서 남학생 10명, 여학생 10명이 단체로 공원에서 만나 미팅을 했다. 대학 입시라는 지긋지긋한 숙제를 끝낸 친구들과 작은 추억을 남기려는 이벤트였다. 단체 미팅에 참여하지 않았던 같은 반 친구가 내 뒷담화를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얌전한 척하더니 뒤에서 호박씨를 까고 있다고...’
충격적인 말이었다. 나는 얌전한 척을 한 적이 없었다. 주말이면 친구들이 인근 여고 학생들과 미팅을 한다며 소란을 피울 때 관심을 갖지 않았을 뿐이었다. 피 끓는 청춘에 연애하고 싶은 욕망은 나도 철철 넘쳤었다. 하지만 ‘여자’라는 존재는 수능이라는 큰 숙제가 끝난 이후에 만나야 하는 대상으로 잠시 미뤄둔 것뿐이었다. 그리고 유혹이 들 때마다 샤프로 허벅지를 찌르며 가마니처럼 가만히 앉아 책을 봤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미팅은 자기와 같이 노는(?) 학생의 전유물이고 나와 같은 범생이들은 넘보면 안 되는 자신만의 '나와바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 친구의 뒷담화는 범생이들은 가만히 있던 대로 ‘가마니’처럼 찌그러져 있으라는 말로 들렸다.
스무 살이 넘어서며 나는 ‘감정의 판도라 상자’를 열기로 했다. 내 의견을, 생각을, 욕망을 표출하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 주장이 없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의견이 있는 ‘신경 써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를 세상에 보여주고 내 생각을 표출하기 위한 나만의 ‘딴짓’을 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나의 ‘딴짓’은 ‘가만히’ 있다가 ‘가마니’가 돼버린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이었고, ‘반작용’이었고, 늦게 시작한 '일탈'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나의 ‘딴짓’은 계속되었다. 금요일 퇴근시간 30분 전, 직원들에게 퇴근을 알리는 사내 음악 방송 DJ를 손들어 참여하기도 했다. 송년회 부서 회식에서 게임 이벤트를 진행하며 사회를 보기도 했고, 사내 아나운서로 인터넷 방송 활동도 했다.
나를 세상에 보여주는 뚜껑이 열리고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관종’이었다는 사실을. 대중 앞에 서서 내 생각과 의견을 드러내는 일에 내가 희열을 느낀다는 사실도.
마흔의 어느 날, 나는 육아휴직을 냈다. 쌍둥이들의 초등학교 입학 준비도 해야 했지만 ‘착한 직장인’으로서 ‘가마니 직장생활’을 하던 내 인생에 브레이크를 걸고 싶었다. 나는 더 이상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따라 ‘가마니 인생’을 살아갈 운명이 아니었다.
그리고 육아휴직 중 운명처럼 ‘마인드맵’이라는 신박한 도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가마니 인생’을 마인드맵이 얼마나 흔들어 놓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