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명절 때가 되면 잊지 않고 준비하는 게 있었다. 바로 신문에서 명절 기간 TV 편성표를 찾아 오려두는 일이었다. 명절 며칠 전부터 나름 긴장을 해야 했다. 어느 날엔 연휴 전날 신문에 명절 TV 편성표가 들어있기도 했고 또 어느 날엔 연휴 첫날 신문에 명절 TV 편성표가 들어있는 경우도 있었다. 스크랩한 TV 편성표에서 내가 유심히 봤던 시간대는 밤 9시 50분경이었다. 방송사별로 그 시간에는 재미난 영화들을 많이 배치했다. 밤 12시까지 졸린 눈을 비비고 버티면 가끔 야한 장면이 나오는 성인영화를 보는 횡재(?)를 누릴 때도 있었다. 그 시절 TV 편성표는 명절 기간 동안의 내 생활계획표였고 TV 시청시간에 대한 이정표였다.
지난 28일 미국 유력 일간지인 뉴욕타임스가 지면에서 TV 편성표를 없애겠다고 발표했다. 81년 만에 뉴욕타임스 지면에서 TV 편성표가 사라지는 것이다. 뉴욕타임스 편집자 길버트 트루즈는 "우리는 확실히 스트리밍의 시대에 있다"며 "TV 편성표는 사람들이 TV 프로그램을 소비하는 방식을 반영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돌아보면 나도 TV 편성표를 찾아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명절이 돼도 이제는 TV 편성표를 찾지 않는다.
뉴욕타임스의 이번 결정은 'TV의 위기'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문제는 사람들이 TV 편성표를 찾지 않는 것이 아니라 TV 자체를 안 본다는 데 있다. TV가 유튜브나 넷플릭스, 웨이브 같은 OTT 서비스(over the top, 개방된 인터넷을 통해서 방송, 영화 등 미디어 콘텐츠를 제공하는 서비스)에 자리를 내준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심지어 한 스타 PD는 TV에서 5분짜리 정규방송을 편성하고 나머지 분량 20분은 유튜브에서 공개하는 시험방송을 하기도 했다. 마치 예고편 같은 5분짜리 정규 방송이 끝난 후 유튜브를 통해서 20분 분량의 본 방송을 시청하는 것이었다. 성공 여부를 떠나 이러한 시도 자체가 미디어 환경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TV는 사라질까?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뉴욕타임스도 지면에서 TV 편성표를 없앴을 뿐 TV 프로그램 관련 기사는 더욱 다양하게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단, 확장된 TV 개념 속에서. 뉴욕타임스 인기 기사 중 하나는 '지금 볼 만한 넷플릭스 영화 BEST 50'처럼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을 소개 기사라고 한다. '미디어 = TV, 신문, 라디오'인 공식이 깨진 지 오래다. 유튜브, OTT 서비스, SNS 등 수많은 신규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은 정보와 재미를 얻으며 시간을 보낸다. 재미난 영상, 변화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과 지혜를 알려 주는 영상 등 내 시간을 '순삭'(순간 삭제)하는 영상들이 넘쳐난다. 빅데이터 시대일수록 중요한 것은 빅데이터가 아니다. 빅데이터는 '디폴트'(기본값)이다. 감당 안될 만큼 쏟아지는 데이터 홍수 속에서 '스몰 데이터'를 찾는 일이 중요해졌다. 소비자에게 의미와 재미를 주는 '핵심 데이터'를 찾아 소비자의 삶에 연결시키는 일, 그것이 스트리밍 시대에 TV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다.
폐지된 개그 프로그램 개그맨들이 성공한 유튜버로 재기한 사례들도 TV가 가야 할 길의 실마리를 준다. 개그콘서트, 웃찾사 등은 한 때 한 시대를 풍미했던 프로그램들이었다. 특히 국민방송 개그콘서트는 최고 시청률이 49.8%였다고 한다. 경이로운 수치다. 개그 프로그램 폐지 이후 일자리를 잃은 일부 개그맨들은 유튜브 시장에 뛰어들었다. 자신의 이름 뒤에 TV를 붙여 'OOOTV'라는 채널명으로 개그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웃찾사 출신 '흔한 남매'의 유튜버 구독자는 200만 명을 넘어섰다.거대 자본을 가진 방송사의 유튜버 계정 구독자가 수백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대단한 성과인지 알 수 있다.개그맨 유튜버들은 규제와 제한 없는 자신만의 TV에서 자신들의 끼를 맘껏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TV는 다양하게 확장된개념의 TV들과의 연대를 고민해야 한다. 스타 PD가 TV는 예고편을, 유튜브는 본 방송을 보여준 시도처럼.
TV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형태와 역할이 변화할 뿐. 방송국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변화하는 TV의 형태와 역할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할 경우 그 앞날은 장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