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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서 Oct 14. 2024

다수결의 반칙- 네번째 반칙

4) 나와 다른 소수에 대한 반칙

오래전부터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는 걸 매우 자랑스러워하며 단일민족의 우수함에 대해 강조해왔다. 단일민족이란 하나의 순수 단일민족으로 이루어지거나 단일민족 속에 소수의 다른 민족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수가 극히 적은 국가의 민족을 말한다. 단일민족 개념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다른 민족은 '소수'라고 명시가 되어 있다.


내가 어릴 때 학교에서 이 단일민족이라는 게 매우 자랑스러운 것이라고 가르쳤던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대부분인 몇 안 되는 단일민족 국가라며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학년이 올라가며 '족외혼'이라는 걸 배우며 의문이 생겼다. 족외혼은 같은 종족끼리의 혼인을 기피하고 다른 민족과의 혼인을 장려하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나라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동성동본' 즉, 같은 성씨를 가진 남녀 간의 결혼을 금지했던 제도가 있기도 했다.

합스부르크 가문 하악전돌증, 출처: 나무위키

이런 가까운 종족 간의 결혼을 기피하게 한 제도의 바탕은 유전학에서 비롯되었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같은 성씨나 친인척, 같은 종족 등 가까운 유전자가 만나면 후세가 유전적 결함이 생긴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역사적으로도 보았을 때 유럽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가문의 순수 혈통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근친혼을 했고 그 결과 대부분이 유전적 결함인 주걱턱(하악전돌증)을 앓았다.

그리고 신라시대의 성골 역시 합스부르크 가문처럼 성골의 혈통만 보전하겠다는 일념으로 근친혼을 고집했었고 그 결과, 갈수록 성골의 남자 수가 줄더니 후대에 아들을 낳지 못하며 진덕여왕을 끝으로 자연스레 그 대가 끊겼다. 성골은 성골 외 진골 남자도 혼인 상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끝까지 성골만 고집하다 결국 소멸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우리의 단일민족 사상은 여전히 뿌리가 깊다. 그래서 그런지 동양의 나라들 중 우리나라가 유독 이민족에 대한 배척심이 강한 편이다. 일본은 일찌감치 외국인 수용 제도를 통해 오래전부터 섞여왔고, 중국은 원래 소수 민족이 많아 단일민족이란 생각 자체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뿌리 깊은 단일민족 사상 때문인지 이민족에 대한 수용성이 매우 낮고, 다른 민족을 폄하하는 표현도 오래전부터 매우 다양하게 존재했다.


- 일본인: 쪽바리

- 중국인: 짱깨, 짱꼴라, 땟놈

- 백인: 양키, 코쟁이

- 흑인: 깜둥이

- 혼혈: 튀기(혼혈을 지칭하는 단어로 원래 말과 소 사이에 태어난 짐승을 '특'이라고 한 우리말에서 온 것으로 추측), 잡종  등


이런 표현 역시 일종의 인종 차별적 표현이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내뱉고 있다. 알고 보면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전통 아래 소수의 외국인에 대한 다수결의 반칙을 꽤 많이 범하고 있다.


요즘 공장이나 식당에 가보면 외국인 근로자 수가 상당히 많다. 아니, 그들이 없으면 공장과 식당이 운영되기 힘들다고 할 정도다.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업종에서 부족한 인력을 외국인들로 채우고 있고 최근 필리핀 가사도우미들이 입국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의 노동력 결핍을 보완해 주고 인구 감소 위기의 대책 중 하나가 될 수 있지만 이런 소수의 이민족에 대한 다수결의 반칙은 여전히 많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범하는 반칙은 이런 외국인 노동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외국인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면 '다문화가정'이라고 칭한다. 이런 다문화가정이 우리나라에서 자리 잡고 적응하는데 힘든 점이 많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많은 지원과 도움을 주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 역시 성장과정에서 인종차별의 상처를 적지 않게 받는다고 한다. 특히 부모의 국적이 우리보다 후진국이라면 다수의 무시 강도는 훨씬 강해진다. 이처럼 나와 다른 소수의 외국인에 대한 다수결의 반칙은 여전히 팽배해있다. 우리도 서양에서 종종 인종차별을 겪는 걸 보면서도 말이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한국인의 인구 감소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시간이 지나 한국으로 유입된 외국인의 수가 다수가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장애인에 대한 차별도 아직 많은 개선이 필요하다. 이 부분도 물론 예정보다 많이 좋아졌지만 선진국과 비교해 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아무래도 사회 시스템이 다수의 일반인에 맞춰지게 되다 보니 소수의 장애인을 위한 시스템은 사회적 비용이 추가될 수밖에 없다. 사회적 시스템 개선도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더 갈 길이 멀어 보이는 건 장애에 대한 인식 개선 교육이다.

우리 사회는 오래전부터 장애에 대해서도 비하적인 표현을 상당히 많이 사용해왔다.

- 사지장애: 병신, 애자, 앉은뱅이

- 시각장애: 외눈박이, 애꾸, 봉사, 장님  

- 청각장애: 벙어리, 귀머거리

- 지적장애: 또라이, 정신병자, 저능아 등


교육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런 표현들을 자연스럽게 접했고, 또 자연스럽게 장애인에 대한 인식도 이 단어들을 따라가게 되었다.


얼마 전, 학생들의 대화에서 '애자냐?'라는 말이 많이 들어가는 걸 들었다. 그래서 난 그건 장애인 비하적인 표현이니 앞으로 그런 말은 쓰지 말라고 일깨워 주었다. 하지만 난 이 상황을 통해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고 있는 교육 현실을 알게 되었다. 요즘의 아이들에게도 장애인을 비하하고 차별하는 습관이 자신도 모르게 학습되고 있다는 걸 직접 목격하면서, 세월이 바뀌어도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는 조기 교육이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영어는 예나 지금이나 조기 교육의 열풍이 식지 않고 있지만.


예전에 왼손잡이 친구가 다시 태어나면 왼손잡이가 되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오른손 잡이가 다수이다 보니 왼손잡이의 불편함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문 손잡이 방향만 봐도 죄다 오른쪽에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장애는 찾아올 수 있고 언젠가 우리도 소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은 나와 다른 소수가 아니라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회사에서 다른 팀과 동반으로 한 달에 한 번 점심 회식을 하는 날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점심 회식 장소가 '비건 식당'이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왜 비건 식당이지?'라며 어리둥절했다. 어떤 직원들은 비건 식당도 맛집이 많다며 체험해 보자는 거 아니냐고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 직원들은 알게 되었다. 다른 팀에 비건인 직원 한 명이 있는데 그녀를 위해 비건 식당으로 장소가 정해졌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게 된 다수의 직원들은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왜 우리가 그 한 명한테 맞춰야 해?'

'그 사람만 빠지면 만인이 편하지 않나?'


이렇게 시작된 회식 전의 불평은 비건 식당의 요리에 만족하지 못한 직원들이 식당을 나오면서 그 강도가 더 세졌다. 그리고 다음부터 다시는 이런 회식에 참여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난 이런 불평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다. 다수가 한 사람에게 맞추는 건 누가 봐도 비효율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느낄 수 있었다. 비건인 그 한 명도 그 자리가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그녀가 원했던 게 아니라 팀장이 그녀를 배려한다며 비건 식당으로 밀어붙인 것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만약 다수가 이런 배려를 가끔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영영 회식에서 배제되어야 하는가?'


이 비건 회식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후 그녀는 회식에 참가하지 않았고 다수는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난 이런 생각을 했다. 일 년에 열두 번 하는 회식에 한 번 정도는 비건 식당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나조차 소수였다.


 

논비건이 갑자기 비건이 될 일은 거의 없겠지만 우리는 살면서 다수가 나를 배려해 맞추는 경우를 종종 겪는다. 몸이 안 좋은 나를 위해 죽을 같이 먹어주기도 하고, 다이어트 중인 나를 위해 샐러드를 같이 먹어주기도 하고, 별다방 커피가 아니면 안 되는 나를 위해 다 같이 별다방을 가기도 한다. 이런 가끔의 다수로부터 받는 배려가 있기에 아직 세상은 살만하고 회사도 버틸만하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좀 더 개방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인종이 다른, 신체적 능력이 다른, 식습관이 다른 사람들에게 범하는 다수결의 반칙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들이 사회적 소수인 것이 근본적 이유이다. 우리가 외국에 나가면 큰 소리를 못치고, 걸리버처럼 우리가 소인국에 간다면 거인으로 취급받을 것이고, 세상에 비건이 다수라면 논비건이 이해되기 힘들 것처럼 수적 우세에서 열세가 되는 순간 입장은 바뀐다.


반드시, 언제나, 절대적으로 소수가 다수에게 맞춰야 한다는 다수결의 반칙은 잊어버리자. 다수도 소수에 맞출 수 있고, 다수도 소수의 결정에 따를 수 있다. 마치 다수결의 원칙이 절대적 기준이 되는 것처럼 가르치는 교육 방식은 다수결의 반칙자들을 더 키울 뿐이다. 소수라는 이유로 소외되는 다수결의 반칙이 없어지도록, 수적 우세가 열세를 짓누르지 않도록, '우리끼리'가 아닌 '우리 같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회가 다름 아닌 유토피아가 아닐까.   


작가 인스타: @author.otho

작가 유튜브: https://www.youtube.com/@othop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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