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소설로 분류는 되지만 '현대'라는 칭호를 붙이기엔 어색할 정도로 더 고전적인 느낌의 소설 '무정'. 1917년에 세상에 나온 이광수 작가의 무정은 그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지금까지도 구전되고 있다. 사실 이 책의 두께를 봤을 때 '이걸 어느 세월에 다 읽나...'싶었지만 명작은 명작인지라 페이지가 술술 잘 넘어갔다.
장장 약 500쪽에 달아하는 엄청나게 긴 장편소설 무정. 어쩌면 지금과는 너무 다른 시대의 내용이라 공감이 쉽지 않을거란 예상과는 달리 격한 공감을 주었고 세밀한 인물 묘사와 심리 묘사 그리고 배경 묘사는 요즘의 소설보다 훨씬 뛰어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정을 쓴 작가 이광수의 약력을 보는데 마지막 즈음에 친일파라는 내용이 있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친일파.'
이런 이력이 있는 작가의 작품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 맞는가? 창씨개명은 차치하고 라도 학병이 되길 권유하고 다니는 행위를 했던 인물인 이광수 작가. 물론 작가와 작품은 별개로 생각할 수 있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형식이 영채와 선형 이 두 여자에 대한 비교를 하는 대목. 내가 무정을 읽으며 가장 많이 공감한 부분이 1910년대나 2020년대인 지금이나 세상은 변했지만 인간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
형식은 오갈 데 없던 자신을 키워주고 가르쳐 준 은인 박진사의 딸 영채를 7년 만에 재회하여 기뻤으나 이미 몰락한 양반의 딸이자 기생이 된 영채의 현 처지와 새로이 알게 된 부잣집 딸 선형을 내심 비교하기 시작한다.
100년이란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 모습은 여전하지 않은가? 100년 전의 인간은 나름의 순수함이 있을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느끼는 대목이었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속물이고 계산적이니까.
이런 형식의 고민하는 태도가 잘못됐다는 건 결코 아니다. 조건을 보고 사람을 만나든, 얼굴을 보고 만나든 개인의 선택이니까. 예전에 한 여자가 나에게 어떤 여자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 예쁜 여자가 좋다.'고 했더니 그녀는 날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사람을 어떻게 외모만으로 판단하냐?'며 핀잔했다. 그래서 그 핀잔에
'그럼 당신은 심성과 인성만 좋다면 무직이어도 상관없냐?'고 내가 되물으니
'직업은 있어야지.'라고 하길래
'외모를 보는 난 경박하고 직업을 보는 넌 신중한거냐?'라며 반문한 기억이 있다.
참 희한하지. 외모를 보는 건 수준이 낮은거고 직업을 보는 건 당연한거라니. 말이 직업을 보는거지 결국 경제력=돈 아닌가? 그럼 이게 더 속물 아닐까? 얼굴을 따지든, 몸매를 따지든, 학력을 따지든 그건 개인의 선택이자 취향이지 경중을 따질 건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100년 전 사람인 형식이 영채와 선형을 비교하며 고민하는 것도 충분히 공감과 이해가 간 부분.
기생이 되었지만 정절을 지켰다는 영채의 말을 듣고 안도하며 영채가 더 예뻐보이는 형식의 심리 묘사를 나타낸 대목.
그 놈의 정절이 뭐라고. 난 가끔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유교가 망쳐놓은 것이 참 많다고. 허례허식과 가부장적 사고, 사대부니 양반이니 하는 책상 머리에만 앉아 품격만 따지며 과학기술을 천대하다가 과학기술로 무장한 무기로 밀고 들어온 외세에 엄청난 고통을 당했으니까.
무정의 시대에 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사실 지금도 성에 대한 불평등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무정을 읽으면서 깜짝깜짝 놀랐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어서.
형식이 영채가 정절을 지켰다는 얘기로 안심은 했으나 그래도 기생이라는 생각에 혼자 오만가지 상상을 하는 대목.
영채가 정절을 지켰다는 사실을 들을 땐 그렇게 영채가 예뻐보이더니 그래도 영채는 기생이기에, 형식은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이 또한 지금도 실행되고 있지 않는 '직업엔 귀천이 없다.'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다. 직업의 귀천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존재하고 있고 직업에 따라 다른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는 것도 여전하니까.
그런데 이 대목이 인상 깊었던 가장 큰 이유는 형식이라는 아주 고상하고 학식이 높은 인물이 이런 유치한 사고방식을 고민의 바다에 띄운 뒤 표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교양있니, 많이 배웠니 해봐야 이런 생각이나 하고 사는 인간들이 지금은 더 많으니까.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형식이 살았던 100년 전에도 그랬고 내가 살고 있는 지금도 그렇고 후손들이 살아 갈 앞으로도 그럴 거 같다.
영채를 강간한 인간이 돈이 많다는 이유로 내일 아침이면 풀려날거란 생각을 하는 대목인데 재벌 2세나 3세들과 다를 게 없다. 정말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아니 바뀌었다. 업그레이드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자살을 하러 갔다는 영채를 찾으러 온 평양에서 알게 된 기생 계향을 보더니 영채가 죽었다면 어쩌나라는 걱정은 온데간데 없고 오히려 여러 번 웃고 있는 형식의 모습.
소설 무정에서의 형식은 무정한 사람인지 아닌지 참 애매했다. 죽는다는 영채를 찾으러 갈 때만도 죽을 것처럼 굴더니 계향을 알게되며 히죽거리는 형식이라는 인물이 참 오묘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참 교육자라고 자부하며 도덕적 삶을 좇는 사람이 이런 심리를 보일 때면 공부만 해서 순진하다고 해야할 지, 알고보니 세상 이상한 놈이라고 해야할 지.
이 시대에도 허세는 여전했다. 좀 더 아는 척, 좀 더 잘난 척, 좀 더 있어 보이는 척.
참 없이 살았던 시대에도 사람들은 있어 보이려고 전력을 다해 노력했던 것 같다.
젊을 때 미인이었던 여자가 이제는 노파가 되어 땀을 흘리는 모습을 이 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그가 흘리는 땀이 곧 아름다움이 녹아내리는 물인 것 같다.
난 이 문장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파가 흘리는 땀을 아름다움이 녹아내리는 물로 비유하다니!
이광수라는 작가는 정말 묘사의 신인가. 노파의 이 대사에서도 난 경탄을 금치 못했다.
젊었을 때에 우는 것은 늙어서 웃는 것보다 낙이다.
어떻게 이런 문장을 만들어냈을까. 젊었을 때 우는 게 늙어서 웃는 것보다 낫다. 이 대사는 앞으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더 선명하게 떠오를 것 같다. 젊음이 최고의 선물이라는 것은 늙음을 마주해야 서서히 깨닫게 되는 것이니까.
죽으려던 영채는 기차에서 만난 병욱과의 대화로 삶의 용기와 희망을 얻는다.
자살사회. 우울한 사람들. 외로운 현대인.
우울하고 힘든 사람이 가장 안 좋은 것이 혼자있는 것이고 더 안 좋은 것이 혼자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은 보통 혼자하게 되면 부정적인 종점에 다다르기 때문에. 누군가가 내 얘기를 들어주고 좋은 의견을 주고 부정적인 생각을 희석시켜 준다면 이렇게 사람을 살릴 수 있다.
영채 역시 기차에서 만난 병욱으로 인해 삶을 이어가고 마지막엔 음악가로 성장하게 된다. 만약 지금 혼자 생각하고 있다면 꼭 누군가와 대화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 중 하나가 관심을 갖는 것.
오지라퍼니, 투머치니 이런 단어로 관심가져 주는 사람 면박주지 말고. 남에 대한 관심이 너무 많아도 탈이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곧 주책이 되고 있으니 누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용기를 내겠는가?
이광수 작가의 장편소설 무정은 인간의 지극히 솔직한 심정이 무정하다는 것을 나타낸 것 같았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고 자기 위주이고 자신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것을 인물들의 심리 묘사와 갈등으로 참 잘 그려내며 지금을 사는 우리와 데칼코마니를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