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임울림>
터키를 다녀온 이후, 얼마 만에 글을 쓰는지 모르겠다.
소제목에 '주간'이라는 단어를 달아놓은 이유를 묻지 마시라.
그저 의지를 상기하고픈 마음쯤으로 생각해 두자.
지난 6월, 터키를 다녀오고 나서 프로젝트 오픈 준비로 야근을 많이 했다. 베타 오픈을 마치고 9월 추석연휴를 틈타 몽골 남고비 여행을 다녀왔다. 5박 6일. 적당한 날씨와, 적당한 기간과 아주 기분 좋은 느낌들을 가지고 귀국했다. 이야기는 다음 글에 쓰도록 하고ㅡ왜냐하면, 쓸 말이 많고 사진도 많기 때문ㅡ이번 글에서는 지난 일요일 관악산 등산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부지께 전화 걸어 술주정했던 일에 대해 쓰려한다.
내 술주정은 말이 많아지는 것이며, 포용력이 넓어지는 것이다. 지루한 술자리라면 색색거리며 잠들어버린다. 여하튼, 나는 아부지께 그렇게 말했다. 세상 재미가 하나도 없다고.
어릴 때는 모든 게 새로워서 사건 하나하나, 모든 것들이 설레고 신비롭고 즐거웠는데. 아침에 눈 뜨는 게 너무 좋아서, 그 겨울밤 아침운동하자는 그 약속이 좋아서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한 적도 있었는데. 이젠 같은 일상이 반복되기 때문인지, 숨 쉬고 눈뜨면 어느덧 일주일, 한 달, 반년, 한 해가 스쳐 지나가고, 결국 통장 잔고를 보며 웃음 짓고 카드값을 갚으며 일종의 해소감을 느끼는 '나'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얼마 전에는 일상이 너무 무료해서, 유튜브를 뒤적거리다 AI가 만든 반야심경을 듣다가 울어버렸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이 왜 이리도 마음을 울리는 것일까. 결국, 모든 것은 내가 인지하기 나름인 것을. 삶을 의미 있게 살자고 다짐해 왔건만, 의미라는 것을 찾기 위해 나를 괴롭히는 삶이 되어버린 것이 안타까웠던 것일까. 눈앞에 놓인 것을 그 자체로 보지 못하고 해석하고 분해하고 해체하면서 내가 쥐었던 것들을 빛나지 못하게 산산조각 낸 것이 아니었을까.
EBS에서 참 좋은 프로그램 많이 한다. <위대한 수업>을 우연히 본방으로 보는데, 그 선생님께서는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지식 과잉 섭취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이 대상의 맥락을 파악하고 느끼기보다, 입력하고 쌓아두기 바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택과 집중보다, 봄나들이 혹은 단풍구경 같은 관찰일 텐데-하고 아쉬워했다.
여하튼, 그래서 다시, 아부지께 건 전화로 돌아와서. 나는 아부지께, 요즘엔 세상이 정말 재미없지만, 모든 것에 의미를 담지 않고 그저 해나가는 것이 어쩌면 더욱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어쩌면 나 같이 머리도, 속도 시끄러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시기가 아무 의미 없이 보내는 시기일 수도 있을 거라고. 아부지는 묵묵하게 나를 응원해 주셨다.
한 스님이 그랬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은 단순히 없음이 아니라고, 모든 것은 스스로 인지하기 나름임을 깨닫기 위한 것이라고. 그러므로, 내가 제목에 적어 넣은 '무의미'는 의미 없음이라기보다, 내가 의미에 대해 인식했던 모든 것들을 리셋하고 0으로부터 바라보기 위한 출발.
새로운 건 늘 즐거우니까. 어쩌면 세상이 다시 재밌어질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