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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 Dec 01. 2024

#.39 빛이 있으라

Imagine, I'm aging

  지나고 지난 금요일, 한 친구가 연락이 와서 영화를 추천해 줬다. 황금종려상 어쩌구 하길래, 나도 트렌드에 민감해지자는 다짐을 하고 당장 예매하기로 결심. 영화 제목은 <아노라>. 그 친구는 이 영화가 에로라고 그랬다. 뭐, 멜로, 로맨스 이쯤 되려나. 여하튼 예매 완료. 근데 이 영화 뭐야. 일반 영화관에는 상영을 안 하네?

평소 연희동을 자주 가는 나. 골목 구석구석 다녔던 잔상이 스치며 <라이카시네마>를 떠올렸다. 카페탐방을 좋아하는 나는 이전에 라이카시네마 건물 2층에 있던 카페 '궤도'에 간 적 있는데, 당시 여기서 영화 한번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적 있다.


  세상 핫한 홍대거리를 비집고 연희동에서 숨을 고르고 영화관 1층에서 대기했다. 티켓팅을 하니, 멋진 포스터도 줬다. 적적한데 집에 붙여놔야지-하고 상영시간까지 기다렸다. 사람들은 점점 들어오기 시작하고, 상영 10분 전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상영시작.


ㄴ > /라이카시네마 입구/


영화의 상영시작 후 한 시간 정도는 거의 Porn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섹스씬이 많이 나왔다. 영화 끝나고 배우들을 찾아보는데, 아노라 역을 맡은 배우 마이키 매디슨은 쿠엔틴 타란티노가 그리 아끼는 배우라고 하더라...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어찌 저리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외설에 몰입하는 배우의 자세란. 사람이란 자고로 어딘가에 집중하고 미쳐 있으면 그 모습이 아름다운 것 같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영화를 보기 전이라면 당장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시라!

줄글로 설명하기보다는 느낀 대로 적었다.






사랑은 마침내 스며든다. 마치 할머니 품과 같은 포용과 이해로.

반야의 마약과 대비되는 이고르의 할머니네 약, 반야의 비행기와 대비되는 이고르 할머니의 차.

의미 없이 부벼대는 쾌락이 사랑이라 떠드는 세상 속에서 이름을 잊어버린 아노라.

자기 이름의 뜻을 기억하며, '워리어'라는 의미의 이름대로 살아왔다는 이고르.

이고르는 아노라를 섹스로 기억하는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그녀의 이름이 가진 의미를 묻는다.

아노라의 뜻은 '빛'.

이고르를 통해 그녀가 그녀의 이름을 자각했을 때, 그녀는 마침내 빛이 된다.

사랑이란 내가 미쳐 보지 못한 온전한 나의 빛을 발견하는 사람과의 동행이 아닐까.


+  무거운 주제에 대한 영화 전반적인 분위기를 코믹한 씬으로 환기해 잘 조화시켰다. 그래서 어쩌면 더욱 가슴에 남는 걸지도 몰라. 엔딩씬은 정말 압도적으로 좋았다. 섹스보다도, 아노라의 눈물을 안아주는 것이 먼저인 이고르. 쏟아지는 흰 눈. 엔딩크레딧과 함께 계속되는 낡은 차의 와이퍼 소리.






이전에 비슷한 부류의 한국 영화를 본 적 있다.

결국 사랑의 가벼움에서 반성을 그리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비슷하긴 했는데, 딱히 감동이 없었다.

역시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는 것인가.

그럼에도 우리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소비하는 까닭은 저마다의 색으로 이야기를 다채롭게 하면서 '새로움'을 지향하기 때문일 거다.

그런 의미에서 <아노라>는 새로웠다. 안 그래도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늘 하는 내게 일종의 지침서 같은 역할이랄까. 거부할 수  없이 다가와서 목을 조이는 수많은 사랑을 거쳐, 우리가 성장과 성숙이라는 이름 아래 안착할 사랑의 종착점이란 이런 걸까?


오랜만이었다. 빛이 있는 아름다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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