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에게도 놀이는 필요하다.

예술비타민

by 태린


놀이는 아이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진다. 어른이 되면 놀이는 사치나 소비성이 되고, 유희는 휴식의 틀 안에만 허락된다. 생산성 없는 시간, 목적 없는 행위는 미뤄야 할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가 말하는 ‘치유’와 ‘힐링’은 언제나 놀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 순간들에 가까웠다.

어릴 적 우리는 특별한 이유 없이 노래를 흥얼거렸고, 의미 없는 선을 종이에 그었으며, 몸이 가는 대로 움직였다. 그것은 배워서 한 일이 아니었고, 잘하려는 목적도 없었다. 그저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흘러나온 결과였다. 놀이는 그렇게 존재 그 자체의 표현이었다. 아이에게 놀이가 성장의 토양이라면, 어른에게 놀이는 다시 자신을 회복하는 통로일지 모른다.


어른이 된 우리는 대부분 말을 잘 사용한다. 설명하고 설득하고 해명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말이 많아질수록 정작 전해지지 않는 것들도 늘어난다. 감정, 진심, 설명되지 않는 마음의 결. 그 틈을 예술은 놀이의 방식으로 건넌다. 노래는 말보다 먼저 감정을 건드리고, 그림은 생각보다 빠르게 마음을 드러낸다. 춤이나 움직임은 억눌린 감각을 깨우고, 만들기는 ‘통제할 수 있음’이 아니라 ‘존재할 수 있음’을 경험하게 한다. 이야기는 삶을 해석하기보다 견뎌낼 수 있도록 돕는다.


이 모든 예술적 행위는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몰입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몰입의 상태가 바로 치유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우리는 흔히 치유를 문제 해결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치유는 ‘나를 다시 만나는 시간’에 더 가깝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어떤 속도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일. 놀이는 그 알아차림을 가장 부드러운 방식으로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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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쉽다. 동물과 식물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택하지만, 동시에 생기를 잃지 않는다. 보호와 생존, 표현과 활력은 함께 간다. 인간 역시 사회 속에서 수많은 역할과 책임을 입으며 살아가지만, 그 안에서 생기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숨 쉴 틈이 필요하다. 예술로서의 놀이는 바로 그 틈이다. 목적 없이 그리는 선, 결과를 남기지 않아도 되는 노래, 의미를 해석하지 않아도 되는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다시 살아 있는 감각을 회복한다.


아이들에게 놀이를 빼앗지 말아야 하듯, 어른에게서도 놀이는 사라져서는 안 된다. 예술을 배워야 할 교양으로만 두지 말고, 즐겨도 되는 놀이로 허락할 때 비로소 치유적 힘은 살아난다. 삶을 예술처럼 산다는 말은 거창한 창작을 뜻하지 않는다. 순간순간 나를 살피고, 감각을 깨우고, 표현할 자유를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미 알고 있다. 음악을 들으며 잠시 마음이 풀어졌던 순간, 무심코 그린 그림에 위로받았던 경험, 몸을 움직이다가 이유 없이 웃음이 나왔던 기억을. 그것이 놀이고, 예술이며, 동시에 치유였다. 어른에게도 놀이는 여전히 필요하다. 다만 그것을 허락하는 용기가 조금 더 필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