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이야기하면 비를 빼놓을 수 없다. 비가 와도 너무 많이 오는 나라. 난 비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비가 오기 시작할 때 땅이 젖어들어가는 그 냄새를 너무 좋아했다. 비냄새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곳의 비는 내가 생각하고 겪던 비와는 조금 달랐다. 물방울은 분무기로 뿌리는 것처럼 자잘한 부슬비 같고, 또 내리다 멈추기를 하루에도 수십 번 반복하는 게 일상이다.
사람들은 이미 비에 면역이 되어 있어서 웬만하면 우산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대신 방수가 될 것 같은 재질의 재킷을 많이들 입고 다닌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후드를 푹 눌러쓰거나 아니면 그저 맞고 다닌다. 마치 한 여름에도 더위를 꾹 참으시며 절대 에어컨을 켜지 않으셨던 우리 할아버지가 생각이 난다. 아니,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댁엔 에어컨이 있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곳 사람들도 대부분 집에 우산이 없다. 물론 다 찾아가 본 건 아니지만.
비가 자주 오면 장점도 있다. 실내에서 내리는 비를 감상하는 그 아늑한 느낌을 모두 알 것이다. 쌀쌀하고 푸릇한 스코틀랜드의 초여름에, 따뜻한 홍차를 한 잔 놓고 비 오는 창문을 바라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어쩌다 이곳에서 비틀즈, 오아시스, 루이스 카팔디 같은 뮤지션들이 탄생했는지 느낄 수 있다.
비가 오고 그치기를 자주 반복하기 때문에 같은 지역에서도 어떤 곳은 비가 오고 어떤 곳은 오지 않는 여우비 현상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여우비가 내릴 때마다 곳곳을 잘 뒤져보면 쉽게 무지개를 발견할 수 있다. 무지개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이 들며 기분이 좋아진다. 사람들을 멈춰 세워 사진을 찍게 만드는 그 매력, 자주 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 아닐까?
스코틀랜드 하면 위스키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위스키다. 위스키가 만들어진 본고장이니까. 일 년 내내 서늘한 기후는 위스키의 깊고 복합적인 풍미 형성에도 도움을 준다. 위스키가 오크통에서 숙성되는 동안 자연스럽게 알코올이 증발하게 되는데, 사계절 내내 습한 기후는 이 현상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비가 오는 날 우리가 자연스럽게 막걸리를 원하는 것처럼, 이곳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야외 활동보다는 집이나 펍에서 맥주와 위스키를 찾는 것 같다. 비 내리는 기후는 여러 방면으로 스코틀랜드 위스키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자주 내리는 비와 흐린 날씨가 주는 장점 중 다른 하나는 맑은 날에 더욱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은 장마 기간을 제외하면 비가 오는 날이 잦지 않은 나라다. 그 말인 즉, 맑은 날씨가 그렇게 대단한 이벤트는 아니라는 거다. 반면에 스코틀랜드에서 살다 보면 한 달에 네다섯 번 될까 말까 한 완전히 맑은 날들에 더욱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럴 때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빨랫감을 들고 옥상에 널어놓으면 그 행복감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근처 공원에 가보면 햇살을 만끽하는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을 볼 수 있다.
이게 별 일인가 싶겠지만 아무리 좋은 것도 반복되면 그 행복감이 줄어들게 된다.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가 일 년에 다섯 번이라면 그토록 소중하고 행복할 수 있을까? 자주 볼 수 없기 때문에 특별하고 그 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비슷한 원리로, 요즘은 행복과 만족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는 노력을 많이 한다. 보상과 만족은 적절한 인내와 기다림이 있을 때 극대화 되는 것이니까. 아무리 좋은 위스키라도, 성취를 이룬 후나 특별한 날에 한 번 마실 때 즐거움이 있지, 매일 마셔대면 알코올중독자가 될 뿐이다. 안 좋은 날씨도, 도무지 풀리지 않는 답답한 날들도 미래의 즐거움을 위한 발판일 뿐이다. 요즘은 그렇게 생각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