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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오뚝 May 06. 2020

엄마도 준비가 필요해

나를 잃지 않고 엄마가 되는 법

2020년 1월 31일 오후 2시 ,

평일 집 스타벅스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 시간을 갖는 아주머니 무리,

문제집과 노트북을 들고 자리 잡는 중고등 학생들,

그리고 책 한 권 이어폰을 꽂고 앉아있는 사람들,

그중에 유일한 임산부가 되는 유니크한 경험을 하고 있다.

오늘의 새롭고 유니크한 경험으로 쳐도 되지 않을까

심지어 육아서적도 아니고 자기 계발 책을 읽고 있다.

무려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나 좀 멋있는 거 같다.

봉봉아 엄마 이런 사람이야 (찡긋)



우연히 발견한 임신 중 일기를 보고 있자니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출산 83일째, 이제야 노트북을 펼쳐 키보드를 두드릴

여유가 조금씩 생기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를 보며 기록의 소중함을 절감하는 요즘, 1월의 그날처럼 더욱더 기록을 늘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별것 아닌 저 몇 줄의 일기가 이렇게나 위로가 되는 걸 보면.


엄마도 준비가 필요해 


처음 출산을 준비하며 진부하게 들었던 말 중 하나는 무려 70%나 겪는다는 산후 우울증을 조심하라는 것. 그리고 말 못 하는 아이와의 시간을  오롯이 견뎌낼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비가 올 것 같으면 우산을 준비하면 된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준비를 시작했다. 좋게 말하면 감정이 풍부하고 나쁘게 말하면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라 미리 준비하면 충격이 덜 할 것 같았다. 효율적인 육아를 도와준다는 책도 읽어보고, 주변에 선배맘들에게 수소문도 해봤다(얼마나 우울했는지, 우울했을 때 뭘 하면 되는지). 그리고 나는 아주 우울할 예정이고 눈물을 많이 흘릴 테니 놀라지 말라고 미리 남편에게 경고도 했다. 이만하면 우산은 충분히 준비한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뒤, 드디어 출산을 하고 조리원에 입성했다. 조리원에 있을 때면 그렇게 마음이 힘들다고 주변에 친구들에게 익히 들었던 터라, '그래 올 테면 와봐라 산후 우울증아'라는 생각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비가 내리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우울하지 않았다. 조리원에 들어간 첫날, 막막함에 한참을 울었다는 친구의 말이 떠오르면서 분명 그 친구보다는 내가 더하리라 여겼는데 의외로 쿨한 나 자신에게 나도 놀랐다. 물론 수술 후에 너무 몸이 아픈 나머지 우울할 겨를이 없어서였을 수 있다. 아니면 바쁘게 돌아가는 조리원 프로그램에 몸도 마음도 바빠서 그랬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믿기 어렵지만 나는 남은 30%에 들어가는 사람인가 보다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뻔한 전개이지만 30% 진입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집에 온 뒤 며칠이 지났을 까,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철철 흘리고 있었다. 매일 1시간 간격으로 쪽잠을 자며 수유를 하고 그렇게  밤을 보내고 나면 온 몸에 가시가 돋는 기분이 들었다. 건드리면 모두 다 쏘아버리라 마음먹은 가시나무처럼  세상 모든 것이 다 원망스러워지는 게 이런 가 싶을 만큼 마음이 뾰족해졌다. 나와는 달 몇 시간이나 잠을 자고 출근하는 남편이 일어나며 읊조리는 '피곤하다'는 말 한마디에도 서운했다. 잠시 등만 뉘여도 살 것 같은 내 앞에서 어떻게 저런 말을 하는지 모든 상황이 다 부정적으로만 보였다. 거울을 보다가, 밥을 먹다가, 젖을 물리다가도 자꾸만 멍해지고 어느새  뺨에 흐르는 눈물을 그저 흘려보내고 있었다. 잠시나마 마음의 평정이 돌아올 땐, '이게 다 호르몬 때문이야'라고 위로를 해봤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분비되는  이 '호르몬'과의 싸움에서는 이길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호르몬과의 싸움에서 연일 패배 기록을 경신한 지 한 달쯤 지났을까. 평소처럼 수유를 마치고 아이를 침대에 눕힌 뒤 잠자리로 돌아가는 대신 이어폰을 꼈다. 그리고 멜론 차트에 들어가 가장 위에 올라와있는 노래를 재생했다. 곡명은 V의 Sweet night. 이런 절묘한 조화가 또 있을까. 고요한 새벽시간에 창밖을 바라보면서 귓속에 퍼지는 멜로디를 듣고 있자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온몸에 솟아난 가시가 하나 둘 사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의 행복한 기분을 잊고 싶지 않아 휴대폰으로 적어두었다.




2020.3.14

난생처음 겪는 경험들로 채워지는 하루들을 살아가고 있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나의 아기.

그리고 임신 전과는, 임신 때와는 또 다르게 변한 나의 몸.

끊임없이 나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내속으로 세상에 이끌어 낸 아가에 대한

책임감, 두려움, 걱정으로  보내는 모순적인 하루들이 계속되고 있다.


나를 잃지 않으려 모유를 먹이면서도 책 한 줄이라도 보려고 하고, 어쩌면 그냥 나로서의 나도 존재하고 있다는 일종의 발버둥 인지도 모르겠다.


아가도 자고, 남편도 자고 고요한 새벽시간에 오랜만에 들리는 음악소리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렇게도 소중했던 시간이 있었을 까.


분명 24시간은 변한 게 없는데,

시간의 밀도가 점점 더 깊어지는 기분이다.

뉘엿뉘엿 얼굴을 드러내는 새벽녘 하늘도, 타자를 치는 촉감도, 윙윙 하는 공기청정기 소리도, 삼박자가 딱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순간, 어느 때 보다도 소중한 시간이다. 


엄마가 되어서 더욱더 필요한 나만의 시간


전히 나를 위한 시간. 그거였다. 호르몬과의 싸움에서 나에게 필요한 것. 엄마가 되는 과정에서 더욱더 사수해야 하는 것은 바로 나만의 시간이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나와 남편만을 믿고 있는 이 작은 아이에게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았지만 '나'라는 존재가 모두 2순위로 밀려가는 날이 계속되다 보니 이제, 나로서의 삶이 이대로 끝이 날 것 같아 두려웠다. 그 두려움 속에서 음악이 재생되는 3분 동안 짧게나마 가졌던 나만의 시간, 그때의 풍경이 그렇게 큰 위로가 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유일한 사람, 바로 나. 이 소소한 진리를 발견한 뒤로는 거짓말처럼 눈물이 줄어갔고  이유 없이 흐르는 눈물도 사라졌다. 그리고 비로소 엄마로서의 나의 또 다른 삶의 변화를 받아들일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수유하는 동안 전차 책 읽기'

'새벽 수유 후에 미라클 모닝 루틴 도전'

'영어 문장 암기'

'아이가 자는 동안 5줄 글쓰기'

'프랑스어 격언 외우기'

'포대기 하고 팟캐스트 듣기'


여전히 하루 종일 아이와 함께 하면서 아기의 시간표대로 생활함에는 변함이 없다. 변한 것이 있다면 엄마로서의 시간의 틈 속에 조금씩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을 끼워 넣는 일이 수월해졌다는 것. 이렇게 여전히 '나'로서의 삶을 지켜내기 위한 작은 성취들이 늘어날수록 엄마로서의 '나' 그리고 커리어 우먼이었던 '나'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엄마'라는 이름이 어색하고 서툴긴 하지만, 그리고 앞으로 일을 하게 되면서 또 다른 시간의 충돌을 경험하겠지만 그래도 미리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를 잃어가는 듯한 두려움과 막막함'에 대항할 힘을 이렇게 준비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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