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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느낌표

지하철에서

by 라셀

야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 그녀의 몸은 젖은 솜처럼 무겁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건만, 대림역에서 갈아탄 2호선에는 빈자리가 없다. 그렇다, 금요일이었다. 그녀는 젊은이들을 피해 육십은 훌쩍 넘어 보이는 늙수그레한 아주머니 앞으로 걸음을 옮긴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차량에 몸이 제멋대로 흔들린다. 두 정거장을 지나자, 영등포역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아주머니 오른편에서 졸고 있던 아가씨가 벌떡 일어선다. 두리번거리더니 닫히는 문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간다.

그녀는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유독 길었던 하루에 시달린 몸을 돌린다. 엉덩이가 의자에 채 닿기도 전에 스치는 낯선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주머니가 빈자리에 검은 비닐봉지를 잡은 손을 올리고 있다. 그녀는 있는 대로 미간을 찌푸리며 일 킬로는 더 무거워진 엉덩이를 다시 들어올린다.

영수야!

아주머니가 다른 칸에 대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 살집이 있어 퉁퉁한 더벅머리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온다. 남자가 자리에 앉자, 아주머니가 손가락으로 남자의 들뜬 머리를 빗어 내린다. 두 사람은 뭐라고 소곤대더니 킥킥 웃는다. 잠시 후, 검은 봉지를 뒤적이던 아주머니가 작은 유리병 두 개를 꺼내, 하나를 남자에게 건넨다. 고개 숙여 뚜껑을 따는 남자의 뒷머리가 새하얗다. 두 사람 나란히 인삼 드링크 마시며 키득키득 웃는다.

다정한 모자를 보며 그녀는 뜨겁고 묵직해진 눈을 애써 돌린다. 고개를 들다 화들짝 놀란다. 검은 창에서 지켜보던 엄마와 눈이 마주친다. 만원 버스에서 굳이 다 큰 처녀가 된 딸을 앉히고 서서 가던 엄마. 엄마가 애처로운 눈길로 묻는다.

“다리 아프겠다, 우리 딸?”

속에서 울컥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아니. 괜찮아."

그녀가 짐짓 웃자, 엄마도 따라 웃는다.

바깥이 환해지며 엄마가 사라진다. 빈자리가 났지만 그녀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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