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모로코에서 머물 때 한 한국인 선교사의 식사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모든 요리가 입맛에 맞았는데 특히 양 불고기가 맛있었다. 육질은 부드러웠고 양고기 특유의 누린내가 나기는커녕 달콤한 향이 입과 코를 즐겁게 해 주었다. 비법을 물었더니 모로코 열대과일을 넣은 불고기 양념에 양고기를 재웠다고 했다. 한 나라의 요리가 다른 지역에 가면서 재료가 바뀌고 덧붙여지면서 색다른 요리가 되는 것이 신기했다. 곁들인 샐러드도 익숙하면서 낯선 맛이 났는데 소스 때문이었다. 올리브유 베이스의 프렌치드레싱에 우리나라 겨자소스를 응용해서 만든 것으로 새콤달콤한 맛에 마늘과 겨자의 톡 쏘는 매운맛이 더해져 양고기와 썩 잘 어울렸다. 그때는 이 국적불명의 샐러드 소스가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된 나를 구제해줄 줄 꿈에도 몰랐다.
모로코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 나는 프랑스에서 이 주간 머물 예정이었다. 파리 시내의 괜찮은 숙소는 대부분 비쌌고, 싼 곳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칠층의 낡고 오래된 원룸뿐이었다. 파리 외곽으로 눈을 돌렸더니 광역철도를 타고 한 시간 거리에 집세가 저렴하고 예쁜 단독주택 방이 있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상대방은 다짜고짜 국적부터 물었다. 중국, 한국인은 안 받고 일본인만 받는다고 했다. 케이팝이 뜨고 있는 지금 프랑스에서는 상상도 못 할 황당한 인종차별이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일본인이 깔끔하고 조용해서라고 대답했다. 기분이 나빴지만 날짜는 촉박했고 더 좋은 방을 구할 수 없던 나는 국적보다 어떤 사람인지가 더 중요하지 않겠냐며 나로 인해 한국에 대한 인상이 바뀔 수도 있을 거라고 설득했다. 그랬더니 자기들은 최소 한 달, 그 이상의 숙박자만 받는다고 했다. 너무 단호한 거절이라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기가 생겨, 두 번 더 전화를 걸었고 그들은 결국 세 번째 통화에서 방을 비워두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나의 끈질김에 두 손을 들었는지 역으로 마중 나오겠다고 했다.
이층에 있는 내 방은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썩 마음에 들었다. 나를 경계하는 그들의 눈빛에 깨끗한 인상을 남겨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첫날부터 변기가 막히는 사고를 쳤다. 주인은 못마땅한 얼굴로 변기를 뚫으면서 프랑스 화장지가 한국보다 두꺼운지 아니면 한국인이 화장지를 많이 사용하는지, 전에 있던 한국인도 변기를 막히게 했다고 투덜거렸다.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저녁이 되자, 주방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간단히 샐러드와 카레를 준비했다. 우여곡절 끝에 먹게 된 그날의 첫 끼였다. 샐러드 소스는 모로코에서 본 대로 만들었는데 옆에서 가족 식사를 준비하던 주인 남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향이 강한 생마늘을 샐러드에, 거기다가 설탕까지?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한 입 맛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뜸 앞으로 자기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했다, 나는 샐러드만 준비하면 된다면서. 한국식 프렌치드레싱 하나가 만든 반전이 놀라웠다. 그는 낮에 있었던 변기 사건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들과 함께한 열네 번의 저녁식사에서 먹은 요리는 지금 기억에 크게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파리 대형 백화점 식품부에서 총괄 매니저로 일하는 주인 남자가 아페리티프부터 전채, 메인 요리, 디저트 단계별로 내놓은 와인 때문에 식사 때마다 술에 취했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남자는 어릴 때 미국으로 입양 갔다가 성인이 되어 프랑스로 돌아왔는데 어릴 적 기억 때문에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속내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다양한 세입자를 만나면서 증세가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짧았던 이 주가 지나고 떠나는 날이 오자, 나는 그들에게 얻어먹었던 식사에 대한 보답으로 한국요리를 해주고 싶었다. 간단하면서도 맛있는 부침개, 그중에서도 해물파전이 떠올랐다. 파를 구할 수 없어 대신 호박, 가지, 양파, 감자, 버섯 등 갖은 야채에 다양한 해물을 넣어 전을 부쳤다. 진간장에 식초, 고춧가루를 넣어 소스도 만들었다. 겉모습을 보고 단순히 한국식 팬케이크라고 짐작하던 그들은 맛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각가지 야채가 주는 다양한 맛과 중간중간 씹히는 해물, 그리고 가장자리의 바싹한 식감과 가운데의 쫄깃한 식감에 감탄했다.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난 남자는 숨겨두었던 최고급 와인을 꺼내왔다. 은은한 황금빛이 도는 와인이었다. 한 모금 마시자 진한 향기가 입안에 퍼지고 귀에서 음악소리가 울렸다. 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내가 과장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정말 그날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다. 심지어 무뚝뚝한 그 집 대학생 아들도 아버지에게 다가가 이마에 뽀뽀를 하는 바람에 박수가 터지고 감동적인 식사 자리가 되었다.
그날, 나는 한국의 평범한 부침개가 저녁 식탁에 최고의 프랑스 와인을 불러내고 서먹하던 아버지와 아들을 친밀하게 만든 힘에 놀랐다. 떠나기 전, 한국 요리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주인 남자에게 전을 부칠 때 적당한 밀가루 반죽의 농도와 불 세기, 뒤집기 기술을 전수해주었다. 그리고 남은 조미료와 마른미역까지 탈탈 털어주고 왔다.
헤어질 때, 부부는 나와의 만남을 통해 한국에 대해 아주 다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실제로 한국으로 돌아오고 얼마 후, 그들은 메일을 보내 한국인 세입자를 들였다는 기쁜 소식을 내게 전했다.
내가 처음 방을 구할 때 그들이 한국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어놓겠다는 다짐은 프랑스를 떠날 때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 성공에는 한국의 요리가 한몫했다. 첫날, 기막힌 실수에서 나를 구해준 한국식 드레싱과 한국의 오묘한 매력을 그들에게 일깨워준 부침개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가끔 그들에게서 배운 유일한 요리인 감자 그라탕을 만든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오븐이 없어 압력밥솥에 만들었는데 촉촉하고 찐득한 느낌이 좋아 아직도 솥에 만들어 먹고 있다. 그들도 여전히 부침개를 굽고 있는지 궁금하다. 만들고 있다면 틀림없이 그들의 아이디어가 추가된 프랑스식 부침개일 것이다.